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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

소학

송나라 때 주자가 소년들에게 유학의 기본을 가르치기 위해 교열·가필하여 만든 책으로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필수교재로 널리 애용되었다. 주자(朱子:朱熹)가 제자 유자징(劉子澄)에게 소년들을 학습시켜 교화시킬 수 있는 내용의 서적을 편집하게 하여 주자가 교열가필(加筆)한 것이다. 1185년(남송 순희 12)에 착수하여 2년 뒤 완성하였다. 책의 구성은 내편 4권과 외편 2권으로 모두 6권이다. 내편은 태교에서부터 시작하여 교육의 과정과 목표 자세 등을 밝히고 있는 입교(立敎), 인륜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인간의 오륜을 설명하고 있는 명륜(明倫), 학문하는 사람의 몸가짐과 마음자세, 옷차림과 식사예절 등 몸과 언행을 공경히 다스리는 경신(敬身), 본받을 만한 옛 성현의 사적을 기록하여 놓은 계고(稽古) 등 4권으로 구분되어 있다. 따라서 내편에서는 유교사회의 도덕 규범과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 자세 등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사항들만을 뽑아서 정리하였다. 외편에서는 한나라 이후 송나라까지 옛 성현들의 교훈을 인용하여 기록한 가언(嘉言), 선인들의 착하고 올바른 행실만을 모아 정리한 선행(善行)의 2개 항목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소년들이 처신해야 할 행동거지와 기본 도리를 밝혀 놓았다. 이 책은 조선 초기부터 성리학자들에 의해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 서울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서원 서당 등 교육기관에서 기초 과목으로 활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언해(諺解)본을 널리 보급하여 많은 소년들이 책을 읽도록 권장하였다. 그 내용에 있어서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 도리와 도덕

스리라차 소스

스리라차 소스

매운 고추, 식초, 설탕, 소금 등을 첨가하여 만든 타이식 칠리소스이다. 타이식 칠리소스이자 핫소스이다. 고추, 식초, 설탕, 소금 등을 첨가하여 만드는 매콤하면서 새콤한 맛이 나는 소스로, 아시아는 물론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에 판매되고 있으며 특히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타이에서는 소스, 양념을 뜻하는 ‘솟(ซอส)’을 붙여, ‘솟시라차(ซอสศรีราชา)’라고 한다. 20세기 초 타이의 도시인 ‘시 라차’에서 기원하였으며 때문에 소스의 이름 또한 도시의 명칭을 따왔다고 한다.  스리라차의 유래에 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내용은 없다. 일설에 따르면 미얀마 출신의 제재소 노동자가 시라차에 이주하며 하며 이 소스를 만들었다는 말도 있고, 1930년대에 시라차 마을 출신의 여성이 고향에서부터 만들었던 소스를 결혼 이후 방콕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종류 스리라차는 크게 전통적인 ‘타이식 스리라차’와 ‘미국식 스리라차’로 나눌 수 있다. 전통적인 타이식 스리라차는 미국식 스리라차에 비해 달콤하면서 톡 쏘는 맛이 강하다. 또한 매운맛이 덜하고 묽은 질감을 갖는데, 타이에서는 스리라차를 만들 때 프릭치파(พริกชี้ฟ้า)라고 하는 크기가 크고 매운맛이 강하지 않은 칠리고추가 쓰이기 때문이다. 타이식 스리라차는 디핑 소스로 쓰이거나 국수 요리, 쌀국수,

포츠담·베를린의 궁전과 정원

포츠담·베를린의 궁전과 정원

독일 베를린과 포츠담에 있는 궁전과 정원 유적. 포츠담을 중심으로 베를린까지 이어지는 500헥타르 넓이에 위치한 여러 개의 정원과 공원, 그 안의 150여 개의 건축물들이 복합적으로 묶여 199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곳곳에 건축물과 정원 등을 조성하는 형식으로, 18세기 중반 프리드리히 2세가 상수시 궁전을 지은 것을 시작으로 19세기까지 프로이센 제국의 왕후들이 지속적으로 건물을 짓고 조경에 관심을 쏟은 결과물이다.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눈길을 끄는 건물들, 숲과 분수, 오솔길 등이 어우러진 편안하면서도 아름다운 합작품이다.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상수시 궁전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손수 스케치를 했다는 여름 별장으로 상수시(Sans souci)는 프랑스어로 ‘근심이 없다’는 뜻이다. 1745~1747년에 건립되었으며, 프랑스를 좋아했던 왕이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하여 만들어 ‘프로이센의 베르사유’라 불린다. 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고 푸근한 것이 차이점이다. 앞의 대분수에서 6단의 테라스를 지나 약 20미터 올라간 곳에 세워진 길이 97미터의 단층건물로, 편안한 로코코 양식의 진수를 볼 수 있으며, 문학과 철학, 예술을 사랑했던 왕의 면모가 곳곳에 묻어난다. 왕이 직접 플루트를 연주했던 플루트 연주실, 볼테르가 3년간 머물렀다는 볼테르의 방 등 내부의 볼거리도 풍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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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항쟁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가 개경 정부와 몽골에 대항하여 일으킨 싸움(1270∼1273). 삼별초의 항쟁은 13세기 고려가 몽골에 대항하여 최후까지 항쟁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원래 삼별초는 고려 무인정권하 몽골군의 침입 직전인 고종 17년(1230) 경 집정자 최우(崔瑀)에 의하여 야별초라는 이름으로 조직된 고려의 군사조직이다. ‘별초’라는 말처럼 이들은 정예군으로 선발된 조직이었으며, 무인정권이라는 정치적 조건하에서 만들어진 조직이었던 만큼 친정권적 성격을 가졌다. 몽골군의 대대적 침략이 시작되자 삼별초는 자연히 고려의 가장 강력한 군사집단으로 부각되었으며,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그 규모 역시 확장되었다. 야별초가 ‘삼별초’라는 조직으로 바뀌는 것 또한 이러한 조직 확대의 결과였다. 원종 11년(1270) 강화도의 삼별초는 몽골에 복속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원종의 고려정부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였다. 이들은 몽골에 복속한 개경정부를 전면 부정하고, 새로 조직한 그들의 정부야말로 고려의 정통정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장군 배중손, 야별초 지유 노영희를 중심으로 하여 강화도에서 봉기한 삼별초는 6월 강화도로부터 진도로 이동하여, 용장성을 구심점으로 개경정부와의 대결을 기도하였다. 이들은 구 후백제 지역과 남부 해안지역의 연안 해양세력권 구축을 통하여 개경정부 및 몽골과 대결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몽골의 압력에 대응하는 방편으로 일본과의 공동전선 구축을 시도 하였다. 진도의 삼별초군이 벌인 활동양상은 진도 입거 이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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