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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2세

알렉산드르 2세

러시아의 황제(재위 1855∼1881). 농노제를 폐지하고 사법·교육 제도의 개혁, 일반징병제 등 일련의 내정 개혁을 단행하여 러시아의 전제체제인 차리즘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3제동맹을 맺어 국제적 지위를 높였고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이겨 베사라비아를 되찾았다. 정식 명칭은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Alexandr Nikolayevich). 모스크바 출생. 농노제를 폐지하였으므로 해방황제(解放皇帝)라고도 한다. 니콜라이 1세의 맏아들이고, 시인 바실리 주코프스키의 제자이다. 크림전쟁이 끝날 무렵에 아버지가 죽자 황제가 되어, 농민혁명 전야의 국정을 맡았다. 1856년 3월 모스크바 귀족회의에서 “밑에서 농민이 자신을 해방하는 때를 기다리는 것보다 위에서 농노제를 폐지하는 편이 좋다”는 뜻을 밝히고, 1861년 농노해방령을 발포하였다. 이어 1864년 지방 자치 조직인 젬스트보 개혁을 비롯하여 사법 ·교육 제도의 개혁, 도시의회인 두마제(制)(1870), 일반징병제(1874) 등 일련의 내정 개혁을 단행하여 러시아의 전제체제인 차리즘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황제 자신은 외조부인 프로이센왕 빌헬름의 군국주의에 공명한 인물로 자유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국정개혁도 부패한 지주의 경제를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재편성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수탈의 기구는 한층 더 세분되었다. 이 결과로 도시 ·농촌에 소요가 확대되면서 혁명운동이 격화되자, 반동정책을 취하였다. 1863년의 폴란드 반란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지방자치권의 제한(1866), 정부 내의 자유주의자 추방(1867), 나로드니키(혁명적인 급진적 지식계급)의 탄압 등을 강행하였으나 그것이 도리어 1879∼1880년의 혁명정세를

아라곤의 무데하르 건축

아라곤의 무데하르 건축

에스파냐 아라곤자치지역 테루엘과 사라고사 지방(Provinces of Teruel and Zaragoza)에 있는 역사도시 유적. 무데하르 양식의 역사, 종교 건축물들이 보존되어 있어 1986년과 2001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원래 1986년 테루엘에 있는 산타마리아 데 메디아비야대성당(Cathedral of Santa María de Mediavilla), 산페드로성당(Churches of San Pedro), 산마르틴(San Martín) 성당과 사비오우르(Saviour)성당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테루엘의 무데하르 건축’으로 불렸으나, 2001년 사라고사와 그 주변지역에 있는 6개의 기념물이 추가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테루엘은 아라곤 지역에서 그리스도교도가 이슬람교도, 유대교도와 공존하였던 지역으로 국토회복운동 이후 도시의 재이주사업이 추진되었다. 당시 그리스도교도들은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성당 건설은 이곳에 남아 있던 이슬람교도인 무데하르들이 담당하였다. 무데하르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만든 건자재, 벽돌, 타일 등을 사용하여 이슬람 건축양식에 서유럽의 요소를 배합한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었다.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건축물 가운데, 네모꼴의 평면에 아치, 벽돌과 타일 등으로 다채롭게 장식한 성당의 탑이 무데하르 양식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검고 푸른 타일, 유약 바른 벽돌 등으로 장식한 산타마리아 데 메디아비야대성당 탑(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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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이순신

조선시대의 장군으로 임진왜란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수군을 이끌고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어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출생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45년(인종 1)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漢城府) 건천동(乾川洞, 현재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와의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군수 등을 지낸 방진(方震)의 딸인 상주 방씨(尙州方氏)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이 밖에 해주 오씨(海州 吳氏)와의 사이에 2남 2녀가 있었다. 무과급제와 함경도 근무 1572년(선조 5) 훈련원(訓鍊院) 별과(別科)에 응시했으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탈락하였다. 그래서 30세가 넘은 1576년(선조 9)에야 식년시(式年試) 무과(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와 함경도의 동구비보(董仇非堡) 권관(權管), 발포수군(鉢浦水軍) 만호(萬戶) 등을 거쳐 건원보(乾原堡) 권관, 훈련원(訓鍊院) 참군(參軍)을 지냈다. 하지만 1583년(선조 16)에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부친상을 마치고 1586년(선조 19)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로 다시 관직에 나서, 곧바로 함경도 조산보(造山堡) 만호(萬戶)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녹둔도(鹿屯島)의 둔전(屯田)을 관리하다가 여진족의 습격을 당해 피해를 입으면서 경흥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 당시 이순신의 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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