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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장제스

중국 정치가. 만주사변 후 일본의 침공에 대해서는 우선 내정을 안정시키고 후에 외적을 물리친다는 방침을 세워 군벌을 이용, 오로지 국내통일을 추진하였다. '자유중국' '대륙반공'을 제창하며 중화민국 총통과 국민당 총재로서 타이완을 지배하였다. 출생과 사관학교 졸업저장성[浙江省] 펑화현[奉化縣]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중정[中正]이다. 그의 집안은 소금사업을 하였으나 9세때 아버지의 사망으로 집안은 어려움에 처했다.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중국의 사상을 배웠으며 청소년기에는 영어와 과학등 신교육을 받았다. 1906년 바오딩[保定]군관학교에 입학하고 다음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911년까지 일본 군대에서 근무하였다.  새로운 중화공화국 열망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하였고, 청나라를 타도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데 노력했다. 1918년 쑨원[孫文]의 휘하에 들어가 주로 군사 방면에서 활약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제1차 국공합작 때는 1923년 소련을 방문하여, 적군(赤軍)에 대해 연구하였다. 장제스는 혁명을 위해서는 강한 군사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24년 황푸군관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지냈다. 1926년 중산함사건을 계기로 국민당의 권력을 장악했으며 국민당 내 좌파세력을 척결하면서 국민혁명군 총사령에 취임하였다. 장제스가 주도하는 국민당은 중국 북부에 있는 군벌들을 제압하기 위해 북벌을 개시하였다. 중국 국가주석 취임과 국공내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전과 붉은광장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전과 붉은광장

13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주요 역사적, 정치적 사건과 연관이 있는 곳으로 14세기~17세기 사이에 건축되었다. 왕자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종교의 중심지였다. 모스크바 크렘린궁전과 붉은광장은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수백 년 동안 러시아 권력의 중심지였고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격동의 무대였으며, 러시아 건축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크렘린(Kremlin)은 원래 러시아어로 성채(城砦) 또는 성벽(城壁)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다. 하지만 대문자로 시작할 때는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전을 의미한다.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은 오랫동안 러시아 황제의 거처이자 러시아 정교회의 중심지였으며, 현대에 와서는 구소련 정부 청사로 활용되었다. 12세기 모스크바 공국을 세운 유리 돌고루키 공(公)이 목책으로 세운 요새가 크렘린 궁전의 기원이다. 14세기부터 석조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국력의 신장에 따라 증축을 거듭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현재는 20개의 성문을 갖춘 삼각형 모양의 성벽 안에 궁전과 사원, 탑, 관청 등 많은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크렘린궁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대부분 러시아 정교회 사원이다. 모스크바 총주교의 무덤이 있으며,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우스펜스키 성당, 황실 무덤이 있는 아르헹겔리스키 성당, 황실 예배당으로 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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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안중근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우는 등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고 순국하였다.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생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兒名)을 응칠(應七)이라 지었으며, 자라서는 자(字)로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안태훈이며 할아버지는 안인수로 진해현감을 지냈다. 할아버지가 미곡상을 하여 집안은 부유하였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청년기말타기와 사냥에 능했으며 포수들 사이에서도 명사수로 알려졌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아버지 안태훈이 사병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가담하였으며,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을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도마[Thomas, 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의병활동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학교[三興學校;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07년 연해주(沿海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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