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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마틴 루터 킹

미국의 침례교회 목사이자 흑인해방운동가. 1968년 암살당하기까지 비폭력주의에 입각한 '공민권 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을 이끌었으며 남부 그리스도교도 지도회의(SCLC)를 결성했다.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의 흑인해방운동 지도자. 조지아주(州) 애틀랜타 출생. 침례교회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8년 모어하우스대학 및 펜실베이니아주(州) 체스터의 크로저신학교를 졸업했다. 그 동안에 비폭력 저항과 인종차별 철폐 및 식민지 해방과 사해동포론(四海同胞論) 등을 주창한 간디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어 보스턴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54년 앨라배마주(州) 몽고메리의 침례교회 목사로 취임하였다. 재직 2년째인 1955년 12월, 시내버스의 흑인 차별대우에 반대하여 5만의 흑인 시민이 벌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을 지도하여 1년 후인 1956년 12월에 승리를 거두었다.그 직후 남부 그리스도교도 지도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SCLC)를 결성하고, 1968년 4월 테네시주(州)의 멤피스시(市)에서 흑인 청소부의 파업을 지원하다가 암살당하기까지, 비폭력주의에 입각하여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얻어내기 위한 ‘공민권 운동’(1963년의 워싱턴 대행진 등)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64년에는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주요 저서에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에 관하여 쓴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1958) 외에도 《우리 흑인은 왜 기다릴 수 없는가 Why We Can’t Wait》(1964) 《흑인이 가는

구이화가오

구이화가오

오스만투스 꽃에 한천, 설탕, 구기자를 첨가하여 끓인 뒤 모양을 잡아 식혀낸 중국의 전통적인 젤리로 중추절에 먹는다. 오스만투스 꽃을 첨가하여 만든 젤리이다. 달콤한 맛에 불투명한 형태를 띠는 중국의 전통적인 디저트로 중추절에 먹는 음식이며, 영어로는 ‘오스만투스 케이크(Osmanthus cake)’, ‘오스만투스 젤리(Osmanthus jelly)’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구이화가오는 명나라 시대에 쓰촨성 청두에 위치한 신두(新都)에 거주하던 리우 지샹(Liu Jixiang)이라는 남성이 찹쌀가루, 설탕, 오스만투스 꽃 등을 활용하여 만든 디저트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때 오스만투스 꽃은 중추절에 피는 목서속의 식용 꽃으로, 독특한 풍미와 약간의 쓴맛이 나서 디저트나 차, 와인 등의 요리에 즐겨 쓰인다. 구이화가오는 차갑게 먹는 디저트이며, 장쑤성의 난징(南京), 후베이성의 셴닝(咸寧)에서 만들어진 것이 유명하다.  조리법 한천은 찬물에 30분간 담가 놓는다. 냄비에 물, 한천을 넣고 10~15분간 끓인다. 여기에 락 슈거(rock sugar)를 넣고 녹을 때까지 잘 저어주다가 말린 오스만투스 꽃과 구기자를 넣고 2~3분간 끓인다. 불을 끄고 5분간 식힌 뒤, 몰드에 담고, 실온에서 꽃이 젤리 중앙에 가라앉지 않도록 꽃을 중심으로 내용물을 저어준다. 냉장고에서 젤리를 완전히 식히고, 틀에서 빼낸 뒤, 접시에

카세레스 옛 시가지

카세레스 옛 시가지

에스파냐의 카세레스주에 있는 역사유적. 198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카세레스는 BC 19년부터 로마의 식민지로 발달하였다. 8세기 초에 들어온 이슬람교도들이 그리스도교도들의 국토회복운동에 대항하기 위하여 도시를 요새화하여 지금까지 고딕요새도시의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시가지에는 요새처럼 지은 귀족들의 저택과 성당·성벽·아치 등의 문화재가 흩어져 있다. 무와히드왕조 때 건설한 성벽에는 곳곳에 5기의 방어용 탑이 있다. 시가지 서쪽에 있는 부하고탑은 잡석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쪽에 돌 떨어지는 장치가 달려 있다. 남쪽 측벽을 지키는 레돈다탑은 12세기에 세운 것으로서 바닥이 다각형이고 말굽처럼 생긴 아치가 있다. 동쪽의 로스포소스탑은 성벽 위쪽 통로보다 30m나 높게 지었다. 성당 건축으로는 산마테오성당·산타마리아대성당·산프란시스코하비에르성당 등이 있다. 산마테오성당은 옛시가지의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고딕양식의 건축물로서 1546∼1780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구조는 단랑식(單廊式)이고 반원 모양의 아치 위에 늑골 볼트가 있으며, 건물 안에는 바로크양식의 제단 장식벽이 설치되어 있다. 산타마리아대성당은 고딕양식과 로마네스크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건축물로서 3줄로 된 신랑(身廊)에 고딕양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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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

왕인

고대 일본에서 활동한 백제의 학자.
《일본서기》에는 오진[應神]천황 15년 가을 8월에 백제왕이 아직기(阿直岐)를 보내 좋은 말 2필을 바치니 아직기에게 말을 돌보게 하였는데, 아직기가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인 우지노와키이라츠코[兎道稚郎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에 천황이 아직기에게 '그대보다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하고 물으니, 아직기가 '왕인이라는 사람이 뛰어납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래서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을 불렀으며, 오진천황 16년 봄 2월에 왕인이 오자 태자의 스승으로 삼고 여러 경전과 서적을 배웠는데 막힘이 없었다. 왕인은 후미노오비토[書首] 등의 시조이다"라고 적혀 있다. 또, 《고사기(古事記)》에는 "백제의 조고왕(照古王)이 아지길사(阿知吉師)를 시켜 말 암·수 1필씩을 바쳤으며, 현명한 사람이 있으면 보내라 하니 화이길사(和邇吉師)를 보내 《논어(論語)》 10권과 《천자문(千字文)》 1권 등 모두 11권을 바쳤다. 화이길사는 후미노오비토[文首] 등의 조상이다"라고 적혀 있다. 《고사기》의 화이길사(와니키시[和邇吉師])와 《일본서기》의 왕인(와니[王仁])은 같은 사람인 듯한데, 그가 활동한 시기를 《고사기》는 근초고왕(346∼375)때라고 소개한 반면 《일본서기》는 아신왕(392∼405)·전지왕(405∼420) 때라고 하였다. 이에 《일본서기》를 더 신뢰하여 왕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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