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통합검색

메인 주요 글

주요 아티클

르몽드

르몽드

프랑스 파리에서 간행되는 일간신문. 프랑스어로 ‘세계’라는 뜻으로 스위스의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 및 독일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과 더불어 유럽 대륙의 대표적인 신문으로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파리가 나치스 점령에서 해방된 1944년 12월 18일 드골이 이끄는 새 정부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에 대한 필요한 의견을 수렴하는 수단으로 창간되었다. 타블로이드판(版)으로 사진이나 만화를 싣지 않았으며, 첫 편집주간은 《르 탕 Le Temps》지의 편집장 위베르 뵈브메리였다. 권력으로부터의 독립과 논설 방침의 자주성 확보를 위한 그의 노력에 힘입어 창간된 지 5년이 채 안 되어 15만 부 이상의 발행부수를 확보했다. 국제문제에서는 프랑스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기자들은 자유롭고 소신있는 견해를 피력하며 일관된 이념적 색채는 띠지 않는다. 외국 관계의 기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세계 각국에 40여 명의 특파원이 주재한다. 일간 《르 몽드》의 기사를 발췌한 주간 《르 몽드》와 월간 《디플로마티크》를 발행하고 있는 외에 영국의 《가디언》지와 제휴하여, 《가디언 위클리》에 《르 몽드》의 발췌문을 영역하여 싣고 있다.

부르고스 대성당

부르고스 대성당

스페인의 부르고스주에 있는 성당으로, 프랑스의 고딕 양식이 스페인에 융합된 훌륭한 사례를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1984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스페인(에스파냐)의 카스티야이레온(Castilla y Leon) 자치지방에 속한 부르고스주에 있는 고딕식 성당이다. 이 성당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기 위하여 건축된 것으로, 1221년 카스티야왕국의 페르난도 3세(Ferdinand III) 통치 기간에 마우리시오(Mauricio) 주교가 주도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1293년 가장 중요한 첫 단계 공사가 완성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5세기 중반에 재개된 뒤로 100년 이상 지속되어 1567년에 완공되었다. 뛰어난 건축 구조와 성화(聖畵), 성가대석, 제단 장식벽, 스테인드글라스 등의 예술 작품과 독특한 소장품 등 고딕 예술의 역사가 집약된 건축물로서 이후의 건축 및 조형 예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지정된 면적은 1.03㏊이며, 주변의 완충지역(Buffer zone) 면적은 78㏊이다. 지정된 면적에 포함되는 대성당은 본당 건물과 회랑 및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 평면도는 라틴 십자가 모양에 삼랑식 신랑(三廊式身廊)과 단랑식 수랑(單廊式袖廊), 주보랑(周步廊) 그리고 방사상 제실(放射狀祭室)이 있는 내진(內陣)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랑과 수랑이 교차하는 네 구석에는 거대한 원주(圓柱)가 서 있어 팔각형의 대탑(大塔)을 지탱하고 있다. 서쪽

슬라이드 바로가기
이승만

이승만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초대 대통령. 독립협회, 한성임시정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광복 후 우익 민주진영 지도자로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4선 후, 4·19 혁명으로 사임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우남(雩南), 초명은 승룡(承龍)이다. 1875년(조선 고종 12) 3월 26일(양력 4월 18일)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위의 두 형제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여 사실상 장남으로 지냈다. 3세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 한문을 배우다가 1894년 배재학당(倍材學堂)에 입학, 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가계를 도우며 이듬해 졸업하였다. 일본인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에 대한 복수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관헌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하여 위기를 모면, 이 무렵 개화사상에 심취,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서재필(徐載弼)의 지도하에 설립된 협성회(協成會)·독립협회(獨立協會) 등의 간부로 활약하였는데, 특히 협성회 기관지 《협성회보(協成會報)》의 주필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으로 정부 공격에 앞장섰다. 1898년 정부전복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는데, 동지 한 사람과 탈옥을 꾀하다가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 해 겨울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에 일본의 한국침략저지를 호소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 머물면서 조지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 등

포토커뮤니티

지구촌 여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