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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켓

수켓

흰 살 생선, 조개 등의 해산물과 사프란, 양파, 감자 등을 첨가하여 만든 스페인의 스튜로, 카탈루냐와 발렌시아 지방의 요리이다. 해산물에 사프란, 양파, 감자 등을 첨가하여 만든 스튜이다. 스페인 카탈루냐와 발렌시아 지방의 요리이며, 이때 이때 수켓(suquet)이라는 명칭은 카탈로니아 어에서 주스를 뜻하는 ‘수크(suc)’에서 유래하였다. 이때 카탈루냐의 전통적인 수켓 요리는 ‘수켓 데 페익스(Suquet de peix)’라고 하는데, 여기서 페익스(peix)는 카탈루냐어로 생선을 의미한다. 수켓 데 페익스는 다량의 생선, 마늘, 올리브오일, 토마토 등을 첨가하여 만든 수켓으로, 카탈루냐의 해안지역인 코스타브라바해안에서 기원하였다. 주재료 수켓에 첨가되는 해산물에는 아귀, 대구와 같은 흰 살 생선, 조개, 홍합, 오징어, 새우 등의 다양한 재료가 첨가된다. 야채로는 마늘, 양파, 토마토, 감자 등이 들어간다. 또한 사프란을 첨가하여 향이 강하며 붉은색을 띤다. 이때 요리는 국물의 양이 적으면 스튜, 국물의 양이 많으면 수프가 되는데, 요리하는 이에 따라 그 양이 다르다. 조리법 조개는 신선한 것으로 준비하여 해감한 뒤 깨끗하게 씻어 놓는다. 큰 냄비에 올리브오일을 두른 뒤 다진 양파를 넣어 부드러워질 때까지 볶는다. 여기에 물,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 사프란, 클램 주스(clam juice, 조개를 첨가하여 끓여낸 육수), 레몬 주스를 넣어 끓인다. 육수가 끓기 시작하면 불을 줄여 졸인다. 믹

베르사유 궁전과 공원

베르사유 궁전과 공원

프랑스 일드프랑스 지역의 베르사유에 있는 바로크양식의 궁전으로 본래 루이 13세가 사냥용으로 지은 별장을 루이 14세가 증축하여 1685년에 완성되었다. 절대왕정의 산물로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어 현재는 관광지로 이용된다.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짐은 곧 국가’라고 말했던 태양왕 루이 14세가 지은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물이다. 바로크 양식의 대궁전으로 건물 자체는 물론 내부장식과 부르봉 왕가의 유물과 소장품들, 궁전의 정원까지 당대의 화려함을 엿 볼 수 있다. 애초 루이 13세가 지은 작은 사냥용 별장을 루이 14세가 광대한 정원을 갖춘 대궁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루이 르 보(Louis Le Vau)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이 건물 설계를 맡고, 천재적인 조경사 앙드레 르 노트르(Andre Le Notre)가 정원 설계를 맡았다. 2만 명의 인원에 50년이 넘는 대공사 끝에 태양왕이 72세 되던 해에 완성되었다. 총길이 680m에 남북에 별관을 설치해 대칭형으로 지은 궁전은 이후 유럽 많은 군주들의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궁전은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절대왕정의 상징물로 약탈과 파괴의 대상이 되었으나, 현재는 관광지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베르사유 궁전은 웅장한 외관 못지 않게 화려한 내부로 유명하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7개의 대형 거울이 설치된 ‘거울의 방’이다. 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3m인 이 방의 천장은 프레스코화로 덮여 있고, 곳곳에 대형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이외에도 말을 타고 적과 싸우는 루이 14세의 커다란 부조가 있는 ‘전쟁의 방’, 루이 14세의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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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전도비

서울 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戰勝碑).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639년(인조 17)청나라가 쳐들어온 병자호란 때 조선이 패배하고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은 후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세운 비석이다. 원래의 비명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이다.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이 글을 짓고, 글씨는 오준(吳竣), 비명(碑名)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비신은 대리석, 귀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5.7m, 기단을 제외한 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이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쪽 면에는 한문으로 새겼고, 다른쪽 면에는 만주문(滿洲文)과 몽골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비석 하나에 3개국 문자를 사용하였다. 비석의 모양은 머리의 이수(螭首), 받침돌의 귀부(龜趺) 조각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석조물의 특징적인 것으로 꼽힌다. 원래 석촌호(石村湖) 주변에 세워졌으나, 그 치욕적인 의미 때문에 1895년(고종 32)에 매몰하였던 것을 일제강점기인 1913년 일본에 의해 다시 세워지고, 1956년 당시 문교부에서 국치의 기록이라 해서 다시 땅 속에 묻었다가, 1963년에 다시 세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가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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