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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항로 개척

신항로 개척

15~16C 유럽이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동방과 신대륙으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찾음.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15~16세기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길을 찾아 헤매던 시기였다. 특히 동방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게 있어서 자국 내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산물(상아, 황금, 노예, 향료)들의 산지이자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13C, 동방견문록)에서 이미 간접적으로 접해본 신비의 나라였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중해 장악으로 인하여 당시 유럽은 이슬람을 거치지 않고서는 동방과의 무역이 어려웠다. 이처럼 날로 커가는 동방에 대한 호기심과 경제적 욕구에 자연과학을 비롯한 항해기술의 발달, 기독교의 전파라는 종교적 열정, 국가의 강한 개척 의욕 그리고 수많은 탐험가들의 목숨을 건 노력이 합쳐지면서, 유럽은 이슬람을 경유하지 않고 동방으로 가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길을 찾기에 이른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 중에 가장 먼저 신항로 개척에 뛰어들어 큰 성과를 거둔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1488년 초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1450-1500)의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 도달로 인해 아프리카 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은 이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1469-1524)의 항해로 희망봉을 경유한 인도항로(1498년)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포르투갈과 경쟁하던 에스파냐 또한 유능한 항해가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1480-1521)을 지원하여 동방으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151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들로 바르셀로나 등지에 있다. 1984년 구엘공원·구엘저택·카사밀라가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뒤 2005년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작품 등이 추가되어 확장지정되었다. 스페인의 카탈루냐 자치지방에 속한 바르셀로나를 비롯하여 칸타브리아 자치지방, 카스티야이레온 자치지방, 발레아레스제도 등지에 산재한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의 건축 작품들을 가리킨다. 가우디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직선보다는 곡선을 강조한 아르누보(art nouveau) 스타일의 건축물들로 새로운 공간 미학을 선보여 이후의 건축과 시공 기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건축양식뿐 아니라 정원과 조각 등 장식미술 분야에서도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한 선구자로 꼽힌다. 1984년 바르셀로나에 있는 구엘공원(Park Güell)과 구엘저택(Palacio Güell), 카사밀라(Casa Mila)의 세 작품이 '바르셀로나의 구엘공원, 구엘저택, 카사 밀라'라는 명칭으로 먼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후 2005년에 가우디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당의 예수 탄생 파사드(Nativity façade)와 지하 예배실을 비롯하여 카사 비센스(Casa Vicens), 카사 바트요(Casa Batlló), 콜로니아 구엘(Colonia Güell)  성당의 지하 예배실, 카사 칼베트(Casa Calvet), 피구에라스(Figueras) 별장, 테레시아나스(Teresianas) 대학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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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문

영은문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세웠던 문. 조선은 국초부터 중국에 사대(事大)하고, 책봉(冊封)을 받았다. 1407년(태종 7) 명(明)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서대문(돈의문) 밖에 모화루(慕華樓)를 지었는데, 송도(松都)의 연빈관(延賓館, 영빈관)을 모방한 것이었다. 1430년(세종 12) 이름을 모화관(慕華館)으로 고쳐 불렀다. 모화관 앞에는 홍살문을 세우고 사신을 맞았는데, 황제의 조서(詔書)를 맞이하는 문이라 하여 ‘영조문(迎詔門)’으로 불렸다. 1537년(중종 32) 삼공(三公)의 건의로 문을 개축하여 청기와를 입히고, 영조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1539년(중종 34)에는 중국 사신 설연총(薛延寵)이 조서 외에도 칙서(勅書)와 상사(賞賜)도 있으니, 영조문은 적절하지 않다고 하면서 영은문(迎恩門)이라는 이름을 써주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훼손된 것을 1606년(선조 39) 재건하고, 중국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편액을 써주어 다시 걸었다. 영은문은 모화관과 함께 명에서 청(淸)으로 이어진 조선시대 사대외교의 상징이었다. 갑오개혁이 추진되면서 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의미로 영은문, 모화관, 홍제원(弘濟院) 등의 철거가 논의되었고, 1895년 2월 영은문은 2개의 주초(柱礎)만 남기고 철거되었다. 독립협회에서는 1896년 11월 영은문이 서있던 자리 북쪽으로 독립문을 건립하고(이듬해 11월 완공),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고쳤다. 영은문의 주초는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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