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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마야

고대 멕시코 및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번성한 인디오 문명 및 이를 이룩한 민족의 명칭.
마야문화가 번성한 지방은 3개 지역으로 구분되나, 그 중심을 이룬 것은 과테말라 북부의 페텐지방으로부터, 서쪽은 멕시코의 타바스코, 동쪽은 벨리즈지방에 이르는 중앙지역이다. 여기에 유카탄반도(半島)의 북부지방 및 과테말라고지(高地), 차파스지방으로부터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남부지방 등 2개 지역이 포함된다. 언어연대학적 연구에 따르면 마야어족의 조상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작은 부족으로서, 이들이 남진(南進)해서 BC 3000년대 중반에 서부 과테말라 고지에 정착한 것이라 한다. 그 후 1000년 사이에 이 부족이 두 어족으로 갈라져 하나는 북서로 진출하여 멕시코만(灣) 연안의 아스텍어족(語族)을 형성하였고, 다른 하나는 북쪽으로 나아가 페텐저지(低地)에서 유카탄지방에 이르러 유카테크어족이 되었다. 다시 BC 1000년대 전반에 마야 어족의 모체(母體)로부터 촐 및 촌탈 등 두 어족이 갈라져 나와서 중앙지방의 저지에 들어가 북부의 유카테크어족과 접촉하였다. E.톰프슨에 따르면 촐어족이 마야 고전문화를 창조한 것이라 한다. 초기 마야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는 극히 드물어 과테말라 태평양연안의 오코스(BC 1500) 및 콰도로스(BC 1000) 문화나 과테말라 고지카미날퓨 유적(遺蹟)의 알레파로기(期) 및 라스 차루카스기(BC 5,6세기경)에서도 이들 문화

끌루아이텃

끌루아이텃

얇게 썬 바나나를 쌀가루 등을 첨가하여 만든 반죽을 묻혀 기름에 바삭바삭하게 튀겨낸 음식으로, 타이의 전통적인 요리이다. 쌀가루 반죽을 묻혀 기름에 튀긴 바나나이다. 타이의 전통적인 요리로, 바삭바삭한 식감에 달콤한 맛이 난다. 타이 전역의 노점상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간식이나 디저트, 전채 요리 등으로 활용된다. 타이어로 ‘끌루아이(กล้วย)’는 바나나를, ‘텃(ทอด)’은 튀기다는 의미를 갖는다. 전통적으로 끌루아이남와(กล้วยนำ้หว้า)라는 바나나를 활용하여 만들어졌는데, 이는 일반 바나나보다 뭉툭한 형태에 진한 노란색을 띄는 바나나인 '버로 바나나'를 말한다. 바나나에 묻히는 반죽은 보통 쌀가루, 밀가루, 참깨, 베이킹파우더를 첨가하여 만드는데,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 때는 수산화칼슘, 베이킹소다, 설탕, 소금, 익은 코코넛, 물을 첨가하여 반죽을 만든다. 끌루아이텃은 본디 단독으로 먹는 음식이나 오늘날에는 아이스크림이나  생크림, 초콜릿 소스, 꿀 등을 곁들여 먹기도 한다. 조리법 껍질을 벗긴 버로 바나나를 슬라이스하여 준비한다. 큰 볼에 쌀가루, 밀가루, 라임스톤워터를 넣어 섞어준다. 라임스톤워터는 석회암으로 만든 천연 미네랄 워터로 튀김이나 페이스트리 반죽에 넣으면 더 바삭해지는 효과가 있어 물 대신 사용한다. 잘 섞은 반죽에 설탕, 소

탈린 역사지구(옛 시가지)

탈린 역사지구(옛 시가지)

13세기 십자군기사단에 의해 세워진 성채도시이며 한자동맹의 주요도시로 화려한 공공건물과 상업시설들로 유명하다. 탈린(Tallinn)은 발트해의 핀란드만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로 발트 3국 중의 하나인 에스토니아 수도다. 자갈로 된 거리, 중세풍의 건물과 성벽이 있는 구시가는 1997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탈린은 ‘덴마크인이 만든 도시’라는 뜻이며, 실제로 11세기 덴마크인들에 의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 13세기에는 한자동맹의 중심도시로 2세기 동안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5세기 이후에는 스웨덴, 러시아, 독일 등 주변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았다. 2차 대전 후에는 구소련의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가 1991년에 독립하였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탈린의 구시가는 상인과 일반인들의 거리인 저지대와 영주나 귀족 등 ‘가진 자’들의 구역인 고지대로 크게 나뉜다. 쌍둥이 탑을 통과해서 구시가로 들어가면 먼저 고딕양식의 구시청사와 그 앞의 시청광장이 있다. 구시청사는 북유럽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딕식 건물로 역사박물관과 콘서트홀 등으로 활용되며,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도 있다. 시청광장의 마기스트라트 약국은 1422년 문을 열어 한 집안이 10대에 걸쳐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광장 남쪽에는 니글리스테 교회가 있는데, 13세기에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가 17세기 바로크 양식 개조한 곳이다. 탈린 중심부에 있는 톰페아 언덕에는 주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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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정도전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문신 겸 학자.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였으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방원과 정치투쟁에서 살해되었다.  저서에《삼봉집》,《경제문감》등이 있다. 출생 1342년 고려 충혜왕 3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밀직제학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출생한 곳은 충청도 단양이다. 장성하여 목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당시 동문으로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 등이 있었다. 벼슬과 정치적 입장 1362년(공민왕 11)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듬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고 부친 상(喪)으로 사직하였다. 13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成均司藝)·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고 권신(權愼),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파 권문세족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정도전은 친명(親明)정책을 주장하였다가친원파에게 공격을 받아회진현(會津縣, 현 전라남도 나주)에 유배되었다. 1377년 유형을 마치고 고향 영주(榮州)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이성계와 만남 1383년 함경도 함주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가 그의막료가 되었다. 1384년 성절사(聖節使) 정몽주(鄭夢周)가 명나라로 가게되자 그의 추천으로 서장관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오면서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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