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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

뉴딜

미국 제32대 대통령 F.D.루스벨트의 지도 아래 대공황(大恐慌) 극복을 위하여 추진하였던 제반 정책.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수정을 하였던 점으로 미국사상 획기적 의의를 가진다. 1929년 10월 24일에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 대폭락을 계기로 시작된 경제불황은 미국 전역에 파급되고, 그것이 연쇄적으로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확대되었다. 당시의 대통령 H.후버(재임 1929∼1933)의 필사적인 방지대책에도 불구하고 물가는 계속 폭락, 1932년까지 국민총생산(GNP)을 1929년 수준의 56%로 떨어뜨리고, 파산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따라 실업자가 날로 늘어나 1,300만 명에 이르렀다. 1932년의 대통령선거는 이와 같은 심각한 불황 속에서 시행되었는데, 민주당에서는 당시의 뉴욕 주지사로서 불황 극복에 착실한 업적을 올리고 있던 루스벨트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루스벨트는 경제사회의 재건, 빈궁과 불안에 떠는 국민의 구제 등을 목적으로 한 새로운 정책, 즉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신정책)’을 약속함으로써 공화당의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선 후 1933년 3월 루스벨트는 특별의회를 소집하여 6월 16일까지의 100일 동안, ‘백일의회(百日議會)’라고 불리는 특별회기내에 적극적인 불황대책을 정부 제안의 중요 법안으로서 입법화하였다. 뉴딜 제법안의 작성에 대통령 측근의 경제·법률 분야에서 진보적인 학자와 전문가 그룹, 즉 브레인 트러스트(brain trust)가 기용된 사실은 유명하다. 이렇게

리띠

리띠

통밀가루, 병아리콩가루를 첨가하여 만든 반죽에 각종 향신료 등으로 속을 채워 작은 공 모양으로 구워낸 빵으로, 인도 바하르주에서 유래하였다. 통밀가루를 첨가하여 만든 반죽 속에 향신료를 채워 구운 작은 공 모양의 빵이다. 인도 동부에 위치한 비하르주에서 유래하였으며 자르칸드주, 우타르프라데시주에서도 즐겨 먹는 요리이다. 빵은 석탄이나 나무 장작 위에서 구운 뒤 기(ghee)를 표면에 발라 만든다. 오늘날에는 굽는것이 아닌 튀기는 방식으로 만들기도 한다. 리띠는 일반적으로 구운 가지나 감자 혹은 토마토에 각종 향신료를 버무려낸 요리인 초카(Chokha)라고 하는 사이드 디시를 곁들여 먹는데, 초카를 곁들인 리티는 리띠 초카(Litti Chokha)라 칭하였고, 이는 과거 비하르주 남부를 중심으로 번영하였던 마가다 왕국의 주요 요리로 수백년 전부터 존재하였던 음식이다. 조리법큰 볼에 채친 통밀가루, 병아리콩가루, 아지웨인, 오일, 물을 넣고 부드러운 반죽을 만든다. 반죽 위에 물에 젖은 천을 덮어둔다. 또 다른 볼에 구운 병아리콩가루, 다진 마늘, 다진 생강, 다진 그린 칠리 고추, 코리앤더, 타임, 레몬즙을 넣고 버무려 반죽 향신료 속을 만든다. 반죽을 분할하여 각각의 작은 반죽 덩어리를 만두피처럼 둥글납작하게 만들고 향신료 속을 올린 다음 반죽의 가장자리를 잘 모아 접어 작은 공모양으로 만든다. 반죽을 베이킹 팬에 올리고 오븐에 넣어 30~40분간 굽는다. 이때 반죽이 골고루 익을 수 있도록 구

잘츠부르크 역사지구

잘츠부르크 역사지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같은 예술가들이 활동했던 예술의 도시로 드라마틱한 도시 전경, 역사적 의미가 깊은 도시 구조, 수세기에 걸쳐 많은 교회건물과 유서 깊은 건축물등을 가지고 있는 교회적 도시형태의 중요한 모범사례이다. 1996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본 사람은 영화 속의 무대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의심했을 수도 있다. 중세양식의 건축물과 호수와 숲, 그리고 하얀 눈이 덮인 산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환상의 세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도시가 바로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이다. 빈에서 서쪽으로 300km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 잘츠부르크는 음악가 모차르트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특히 모차르트의 생가는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이다. 그곳에는 모차르트가 사용하던 바이올린과 자필 악보, 가족의 초상화,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매년 여름 그를 기리는 '잘츠부르크 음악제'가 열리면, 도시는 온통 관광객들로 북새통이 되곤 한다. 잘츠부르크는 '소금의 산'이라는 뜻이다. 7세기 후반만 해도 황량했던 도시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라이헨할 소금광산 덕택이다. 광산의 소금으로 부를 쌓은 잘츠부르크는 1077년부터 묀히스베르크산 언덕에 호헨잘츠부르크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후 후기 고딕양식과 바로크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도시 여기저기에 들어서자, 이 도시는 '알프스의 북로마'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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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민영환

한말의 문신·순국지사.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다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자결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1861년 민겸호(閔謙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들이 없었던 백부(伯父)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태호(閔台鎬)에게 입양되었다. 민태호는 음직인 참봉을 지내다가 민씨가 왕비로 책봉되자 출세가도를 달렸던 인물이다. 1877년(고종 14) 5세의 어린 순종을 가르치는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고, 1878년 대과에 민씨 척족의 후광을 입고 장원급제하여 초고속 승진을 시작하였다. 그 뒤 정자(正字)·수찬 등을 거쳐 1881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882년 21세에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그 해 세간의 평판이 좋지않던 생부 민겸호가 임오군란 때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3년간 거상(居喪)하였다. 이런 이유로 후일 그는 동학농민군의 척결 대상이 되었다.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세 차례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렸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일단 관계(官界)로 돌아와, 약관의 나이로 도승지·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한성우윤(漢城右尹) 등을 지냈다. 조선 최초의 신식해군인 해방영(海防營)을 설치하였고 1886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였으나 친청(親淸)세력인 민영익(閔泳翊)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1887년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1888년, 1889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893년 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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