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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몽테뉴

미셸 몽테뉴

프랑스의 사상가 ·모랄리스트. 프랑스의 르네상스기(期)를 대표하는 철학자 ·문학자이며 《수상록》의 저자이다. 자기의 체험과 독서생활을 근거로,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변천하는 대로의 인간을 그렸다. 자연에 대하여 단순히 몸을 맡기는 데에 인생의 지혜를 추구하였다. 프랑스 남부 페리고르 지방의 몽테뉴성(Montaigne城:현재의 생 미세르 드 몽테뉴 마을) 출생. 프랑스의 르네상스기(期)를 대표하는 철학자 ·문학자이며 《수상록 Les Essais》의 저자이다. 대대로 보르도에서 살았던 부유한 상인 가문으로 에이퀨을 성으로 삼았다가 증조부 라몽 에이퀨 때 몽트라베르 남작령(男爵領)에 속하는 몽테뉴성과 그 영지를 매수하여 귀족이 되었다. 아버지 피에르는 프랑스와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종군한 군인으로 문예 애호가이기도 하며, 만년에 보르도 시장에 선출되었다. 어머니의 가계는 포르투갈계(系) 유대인의 피를 받았다고 한다. 몽테뉴는 어려서 라틴어 교육을 받았고, 1554년 페리그 재판소에 근무하여 1557년 보르도 고등법원 참사관이 되었다. 그는 때때로 궁정에 찾아가 프랑스와 2세, 샤를 9세의 신임을 얻었다. 1565년 프랑수아즈 드 라 샤세뉴와 결혼, 156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몽테뉴 영주가 되었다. 아버지의 명으로 번역한 15세기 에스파냐 신학자 레이몽 스봉의 《자연신학(自然神學)》을 1569년에 간행하였다. 1571년 37세로 법관생활에서 물러나 독서와 저작 생활로 들어갈 결심을 하였으나, 신 ·구파의 종교전쟁에 휩쓸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1577년 나바르왕 앙리(뒤의 앙리 4세)의 시종이 되었다. 1580년 써 모은 수필을 간추려 《수상록》(2권)을 보르도에서 간행하였다. 이

라벤나의 초기 그리스도교 기념물

라벤나의 초기 그리스도교 기념물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 지방 라벤나주에 있는 종교 유적. 고대 로마문화와 비잔틴문화가 융합된 화려한 모자이크양식의 종교건축물들이 보존되어 있어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라벤나는 아드리아해와 접하고 포강(Po R.) 하구에 자리잡고 있어 교역의 중심지로 번성해왔다. 5세기 초 서로마황제 호노리우스가 수도로 정하였고 493년에는 동고트왕 테오도리크(Theodoric the Great)에게 점령당하여 526년까지 통치를 받았으며, 540년 무렵에는 비잔티움제국의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이후 라벤나는 동서교역의 중심지로서 경제적인 번영을 누렸으며 고대 로마문화와 비잔틴문화가 융합된  모자이크양식의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이후 751년에는 롬바르드족[Lombard, 랑고바르드족(Langobard)]의 침입을 받아 도시가 파괴되었고 756년에는 로마 교황령이 되었다. 15세기 중반에는 베네치아의 통치를 받았으며 16세기 초에는 다시 교황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라벤나의 성당 건축은 외관은 간소하지만 실내에는 다양한 모자이크를 이용하여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이 가운데 8개의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물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라벤나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네온세례당(Baptistry of Neon, 430년 무렵), 동시대의 기념물 중 모자이크가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갈라플라키디아 영묘(Mausoleum of Galla Placidia, 430년 무렵), 500년 무렵 테오도리크왕이 세운 아리안세례당(Arian Bap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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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신채호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사학자·언론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활약하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출생과 학업 1880년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현재 대전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단재·일편단생·단생 등을 사용했다. 그리고 필명으로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 등을 사용했다. 부친은 신광식(申光植)이며 모친은 밀양박씨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로 부터 한학을 익혔고, 1897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언론활동 1905년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논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활약했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했다. 1907년 항일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會)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에 가입·참가하고, 이와 관련해 다수의 글을 발표했다. 이듬해 순한글 《가정잡지》를 편집·발행했다. 또한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 《기호흥학회보(畿湖興學會報)》 등에 논설을 발표하고 1909년 친일조직인 일진회(一進會) 성토에 앞장섰다. 독립운동 19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평안북도 오산학교를 거쳐 중국 칭다오[靑島]로 망명,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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