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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페스탈로치

요한 페스탈로치

스위스의 교육자로 노이호프에 농민학교를 세웠고 부르크도르프, 이베르돈에 학교를 세워 독자적인 교육방법을 실천하였다. 대표적 저서로는 《은자의 황혼》, 《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 《백조의 노래》 등이 있으며 교육이상으로서 전인적(全人的)·조화적 인간도야를 주 1746년 1월 12일 취리히에서 출생하였다. 취리히대학교에 재학 중 애국자단체에 소속되어 사회운동에 가담하였으며, 1769년 같은 단체원이던 안나와 결혼하였다. 1771년 노이호프에 농민학교를 세웠으나 실패한 후 사색과 저술생활로 세월을 보냈다. 1798년 프랑스혁명의 여파가 스위스로 밀려왔을 때 슈탄스에 고아원을 설립, 전쟁고아를 돌보았다. 그후 부르크도르프, 이베르돈에 학교를 세워 독자적인 교육방법을 실천하다가 만년에는 다시 노이호프로 돌아갔다. 당시의 유럽 사회를 분석하여, 계층간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지적하고 이의 시정은 정당한 교육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민중에게 바른 지성의 힘을 기르게 하면 민중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 할 것이라는 입장에서 인간학교의 이상을 제안하였다. 또한 바른 지성의 힘을 체질화하기 위해서 형(形)수(數)어(語)의 개념을 직관적 경험을 통해서 부여해야 함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인간에게 내재하는 자발성자기활동에 의해 가능하다고 해석하고 기초도야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펼쳤다. 도덕적 도야의 근원을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믿음의 관계에서 찾으면서 생활이 도야한다는 입장을 역설하였다. 그의 수많은 저서들을 보면, 전생애를 통하여 온갖 고경(苦境)을 참으면서 언제나 교사로서의 뜻을 굽히지 않고 교육이라는 외길을 걸었던 강한

서당

서당

예로부터 내려오는 사설(私設) 한문교육기관.
학당(學堂) ·사숙(私塾) ·학방(學房) 등이라고도 한다. 서당에 관한 기록은 한국 사기(史記)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삼국시대 고구려에 경당(扃堂)이라는 부락단위의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것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초기부터 각처에서 성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서당의 기록은 1124년(인종 2)에 왔던 송나라 사신의 서장관(書狀官) 서긍(徐兢)이 저술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마을 거리에는 경관(經館)과 서두(書杜)가 두 개, 세 개씩 서로 바라보고 있으며 민간의 미혼자제(未婚子弟)가 무리를 이루어 선생에게 경서를 배우고, 좀 성장하면 유(類)대로 벗을 택하여 사관(寺觀)으로 가서 강습(講習)하고 아래로 졸오(卒伍) ·동치(童稚)도 역시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운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에 서당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고려의 서당은 그대로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더욱 발전된 민중교육기관으로 신교육이 실시될 때까지 존속해온 가장 보편화된 교육기관이었다. 이 서당은 완전히 사적(私的)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기본자산이나 인가(認可)를 요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흥폐가 자유자재였으며 뜻있는 인사(人士)는 누구나 설치할 수 있었다. 서당이라 불리는 사숙이 성립되는 데는 사족(士族) 자제들을 자기 집에서 가르치는 경우, 가세가 풍족한 집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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