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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예수회

1540년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 등과 함께 파리에서 창설한 가톨릭의 남자 수도회. 1534년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와 그의 ‘영신수련(靈神修練)’으로 단련받은 초대회원들로부터 유래하며 1540년에 로마 교황청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 1541년 4월 8일 초대 총장으로 이그나티우스가 선출되었으며, 1556년 이그나티우스가 죽을 때는 예수회원이 거의 1,000여 명에 이르렀고 4대륙에 걸쳐 사도들이 파견되었다. 제수이트 교단이라고도 하며, 한국에서는 중국식 음사(音寫) 그대로 야소회(耶蘇會)로 써왔다. 16세기 유럽에서는 종교혁명이 일어나 신교와 구교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프로테스탄트들의 활동과 교세가 활발하게 번져갔으며 루터와 칼뱅의 등장으로 가톨릭의 교세는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예수회는 이러한 가톨릭의 위기를 배경으로 탄생하였으며 가톨릭(구교)의 반성과 혁신을 주장하였다. 예수회의 목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원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의 구원과 완덕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 데 있다.예수회의 행동양식은 영신수련을 통해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전적인 자기 헌신에서 나오는 영적이며 인간적인 태도이다. 이 회의 기본정신은 창립자의 정신에 따라 회원 각자의 인격완성과 종교·교육·문화·사업을 통하여 높은 도덕심과 인내, 소명(召命)에 따르는 생활을 하도록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회원은 기도와 고행을 통하여 하느님의 능력을 받고 예

코르도바 역사지구

코르도바 역사지구

코르도바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의 한 도시로서 8세기 무렵 이 곳을 점령한 아랍 무슬림에 의해 황금기를 누리게 되었다. 오늘날 약 300여개의 모스크와 수많은 왕궁을 비롯한 유적들이 존재한다. 다양한 시대와 문화의 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 장소로서 198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코르도바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과달키비르 강변에 위치한 도시로서, 로마와 비잔틴 제국 시기부터 이베리아 반도의 중심지였으며, 8세기에 후기 우마이야 칼리프조(AD 756~1036)가 이 곳에 수도를 정하면서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929년 즉위한 압둘 라흐만 3세때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당시의 인구는 수십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1984년 12월 17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코르도바 역사지구에는 로마시대부터 16세기까지 다양한 시대에 걸친 문화적 유산이 공존하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가장 유명한 유적으로는 스페인어로 메스키타(Mezquita)라고 불리는 우마이야 대모스크가 있다. 이 모스크는 우마이야 가문의 칼리프 압둘 라흐만 1세(재위 756~788)에 의해 서고트족 왕국의 교회가 있던 자리에 786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계속 확장 개축되었다. 모스크의 위치는 로마시대에는 야누스 신전이, 서고트족 통치기에는 산비센테 성당이 있던 종교적 장소로서, 페르시아의 건축가들이 이 모스크를 지을 때 기존 건축물의 석재를 그대로 사용했다. 다주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목조 기둥을 받치고 있는 기둥과 아치의 2단 구조가 인상적이다.  초기에는 가로세로로 각각 11열씩 아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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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사건

운요호사건

일본 군함 운요호가 1875년 9월 20일 조선 해안을 탐측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여,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받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함포공격을 가하고, 영종진에 상륙하여 조선수군을 공격하고 인적·물질적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 사건이다. 배경 19세기 국제사회는 제국주의가 팽배해 있던 시대로, 강대국이 무력을 앞세워 후진국을 압박하여 개항(開港)을 유도하거나 침략하는 사례가 많았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의 포함외교(砲艦外交, 포함을 앞세운 무력시위로 상대국을 압박하여 목적을 달성하는 강제적 외교 수단)에 바로 굴복하고 개항(개국)하였다. 그 후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 개혁을 단행한 후, 조선과의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양이정책(攘夷政策, 오랑캐를 배척하는 정책)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면서 개국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한편, 일본은 정한론(征韓論)의 일환으로 조선과의 수교를 좀 더 신속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포함외교를 시도하게 되었다. 경과 이에 일본은 영국에서 수입한 근대식 군함인 운요호[雲揚號]를 부산에 침투시켰다.부산훈도(釜山訓導) 현석운(玄昔運)이 부산의 왜관(倭館, 일본의 상관이 있고 일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을 찾아가 군함을 침투시킨 이유를 묻자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는‘조선과의 수교 교섭이 지연되는 이유를 일본의 이사관에게 물으러 왔다’고 거짓으로 설명하고, 오히려 현석운을 군함에 승선시켜 함포사격 훈련을 구경시키는 등 군함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운요호는 조선 해안을 탐측하고 연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구실을 대며 동해안을 순항하고 다시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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