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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회담

얄타 회담

제2차 세계대전 종반에 소련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수뇌들이 모여 독일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1945. 2. 4~11). 제2차 세계대전이 장기간 진행되고 있을 때, 이탈리아가 이미 항복한 상태이고 독일마저 패전의 기미가 보이자, 연합국 지도자들은 나치 독일을 최종 패배시키고 그 후의 점령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가졌다. 얄타 회담에는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수상,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 최고인민위원이 참여하였다. 이때 논의된 주요 사안은 다음과 같다. 주요 사안 첫째,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의 처리에 관한 문제다. 미·영·소 3국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이 독일을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연합국은 독일인에 대해 최저 생계를 마련해주는 것 외에는 일체의 의무를 지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독일의 군수산업을 폐쇄 또는 몰수한다고 선언하였으며, 주요 전범들은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하였다. 전후(戰後) 독일의 완전한 비무장화 및 탈군사화, 그리고 분단이 계획된 것이다. 배상금 문제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그에 위임하기로 하였다. 둘째, 폴란드에 관한 문제다. 당시 폴란드의 망명정부는 런던에 있었고, 3국이 모두 이 망명정부를 승인한 상태였다. 그러나

샤이 파니르

샤이 파니르

파니르에 요구르트, 견과류, 각종 향신료를 첨가하여 만든 카레로, 인도 북부 지역의 요리이자 펀자브(Punjab)의 요리이다. 파니르에 요구르트, 견과류, 향신료를 첨가하여 만든 카레이다. 인도 북부 지역의 요리이자 인도 북부와 파키스탄 중북부에 위치한 펀자브(Punjab) 지방의 요리로, 무굴 제국 왕실에서 유래하였다. 요리에는 견과류 요구르트, 사프란 등의 다양한 재료가 첨가되며 크림이나 기(ghee)를 첨가하여 풍부한 맛을 내거나, 토마토, 과일, 로즈 워터 등을 넣고 맛을 내기도 한다. 샤이 파니르는 파라타와 같은 인도의 빵이나 제라 라이스(Jerra rice: 커민과 쌀을 섞어서 지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요리) 등과 함께 먹는다. 조리법 팬에 기를 올리고 캐슈넛, 카르다몸, 아몬드를 넣어 볶다가 주사위 모양으로 자른 양파와 그린 칠리 고추를 넣어 볶는다. 이때 잘게 자른 토마토를 넣어주어도 된다. 내용물을 으깨며 볶은 다음, 약간의 물을 넣고 식힌다.  볶은 내용물을 블랜더에 넣어 페이스트 형태로 갈아두고, 같은 팬에 기나 오일을 올린 뒤 커민, 정향, 시나몬을 넣어 볶다가 다진 생강과 마늘을 추가한다. 여기에 앞서 갈아 놓았던 양파와 캐슈넛 페이스트, 고춧가루, 가람 마살라(garam masala: 매운맛이 강한 마살라로, 서아시아에서 즐겨 쓰이는 혼합

프라하 역사지구

프라하 역사지구

11세기부터 18세기까지 건축된 구도시로 신성 로마제국의 샤를 4세에 의해 세워진 건축물들이 많다. 중세 유럽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로 ‘북방의 로마’ 또는 ’유럽의 심장’ 또는 ’흰 탑의 황금 도시’또는 ’유럽의 음악원’ 등 다양한 수식어들로 찬사를 받는 곳이다. 그리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프란츠 카프카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다는 도시였다고 전해진다. 프라하는 천 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도시다. 12세기에 이미 중부유럽 최대 도시의 하나로 성장했고, 신성로마제국의 수도가 된 14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15세기에는 후스전쟁의 싸움터가 되었고, 17세기에는 최대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이 이어졌다. 2차에 걸친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혁명,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1968년 자유주의운동과 구 소련군의 전쟁이 일어났다. 1989년 무혈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동유럽이 개방되자 유럽 최대의 관광도시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1992년에는 구시가를 중심으로 프라하 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프라하는 고대부터 중세까지 지어진 건축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특히 로마네스크 양식부터 초·중·후기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아르누보 양식까지 시대별 다양한 건축양식의 역사를 관찰할 수 있다.  카프카의 소설 <성>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프라하 성은 궁과 교회, 성당 등이 어우러진 건물들의 집합체로 9세기경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매일 낮 12시에 열리는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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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태조

조선의 제1대 왕(재위 1392∼1398).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정벌을 위해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였다. 막강한 권력으로 전제개혁을 단행하였고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여 조선(朝鮮)을 세우고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겨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본관 전주(全州). 자 중결(仲潔). 호 송헌(松軒). 성 이(李). 휘(諱) 성계(成桂). 시호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즉위 후 휘를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비(妃)는 한경민(韓敬敏)의 딸 신의왕후(神懿王后), 계비는 강윤성(康允成)의 딸 신덕왕후(神德王后)이다. 함경도 영흥(永興)에서 아버지 이자춘(李子春)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1335년(충숙왕 4년)에 출생하였다. 그의 선조는 전주에 살았으나 고조부 이안사 대에 간도지방으로 이주해서 증조부 이행리, 조부 이춘, 부친 이자춘까지 원나라 지방관리를 지냈다. 원나라가 쇠퇴하자 이자춘이 고려에 귀화하였다.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내부(來附)한 뒤 이듬해 유인우(柳仁雨)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이에 내응(內應)하여 공을 세웠고, 후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1361년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토벌하였으며, 같은 해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다음해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전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워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원(元)나라의 나하추[納哈出]가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침입하자 함흥평야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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