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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 퍼프

커리 퍼프

페이스트리 반죽 안을 감자, 닭고기, 카레 등으로 채운 뒤 튀기거나 구워낸 작은 크기의 파이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타이,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즐겨 먹는다. 각종 재료로 속을 채운 페이스트리 반죽을 튀기거나 구워낸 작은 크기의 파이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유래하였으며,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타이 등 다양한 국가에서 즐겨 먹는 간식이다. 나라마다 명칭이 다른데, 인도네시아에서는 ‘파스텔(Pastel)’, 말레이시아에서는 ‘까리빱(Karipap)’, 타이에서는 ‘꺼리팝(กะหรี่ปั๊บ)’이라고 한다. 커리 퍼프의 유래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 형태가 엠파나다나 사모사와 닮았다 하여 타 국가의 요리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설에 따르면 포르투갈에 의해 동남아시아로 전해진 음식이라고 하며, 영국 식민지 시대에 동남아시아에 전해진 음식이라고도 한다. 퍼프 페이스트리의 한 종류로 분류할 수 있으며, 속재료로는 일반적으로 카레, 닭고기, 감자가 사용되나 그 밖에도 소고기, 참치, 달걀, 정어리, 감자, 양파, 무, 두부, 콩, 얌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다. 커리 퍼프는 보통 아침이나, 오후의 간식으로 먹으며 카페나 시장, 바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국가별 커리퍼프 말레이시아에서는 닭고기와 감자를 주재료로 하여 커리퍼프를 만든다. 또한 까리빱 이외에 에뽁에뽁(Epok epok)이라는 작은 크기로 만들어지는 커리 퍼프도 있다. 여기에는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전과 붉은광장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전과 붉은광장

13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주요 역사적, 정치적 사건과 연관이 있는 곳으로 14세기~17세기 사이에 건축되었다. 왕자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종교의 중심지였다. 모스크바 크렘린궁전과 붉은광장은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수백 년 동안 러시아 권력의 중심지였고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격동의 무대였으며, 러시아 건축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크렘린(Kremlin)은 원래 러시아어로 성채(城砦) 또는 성벽(城壁)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다. 하지만 대문자로 시작할 때는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전을 의미한다.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은 오랫동안 러시아 황제의 거처이자 러시아 정교회의 중심지였으며, 현대에 와서는 구소련 정부 청사로 활용되었다. 12세기 모스크바 공국을 세운 유리 돌고루키 공(公)이 목책으로 세운 요새가 크렘린 궁전의 기원이다. 14세기부터 석조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국력의 신장에 따라 증축을 거듭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현재는 20개의 성문을 갖춘 삼각형 모양의 성벽 안에 궁전과 사원, 탑, 관청 등 많은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크렘린궁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대부분 러시아 정교회 사원이다. 모스크바 총주교의 무덤이 있으며,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우스펜스키 성당, 황실 무덤이 있는 아르헹겔리스키 성당, 황실 예배당으로 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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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분묘도굴사건

남연군분묘도굴사건

1868년(고종 5) 독일의 상인 E.J.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德山:예산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생부 남연군 구(球)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굴총(掘塚)사건. 덕산굴총사건이라고도 한다. 오페르트는 1866년 2차에 걸친 한국과의 통상요구에 실패하고 돌아갔다가, 1868년 4월 제3차 한반도답사를 계획, 한때 상하이 미국영사관에 근무한 미국인 모험가 F.젠킨스를 자본주로 하고, 프랑스 선교사 페롱을 통역관 겸 보좌관으로 대동하여 차이나호(號)에 백인 8명, 말레이시아인 20명, 한국 천도교인 약간 명, 청국인 승무원 약 l00여 명을 태우고 상하이를 출항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그들은 북독일연방(北獨逸聯邦)의 국기를 게양하고 충청도 홍주군(洪州郡) 행담도(行擔島)에 와서 정박하였다가, 구만포(九萬浦)에 상륙하여 러시아 군병이라 자칭하면서 함부로 총칼을 휘둘러 지방관헌조차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 다음, 어둠을 타서 덕산 가동(伽洞)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덕산군수 이종신(李鍾信)과 묘지기 및 몇몇 주민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무장한 서양인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날이 밝아 주민들이 몰려오며 내하(內河)의 퇴조(退潮)시간이 임박해지자 이들은 관곽(棺槨)까지 파낸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구만포로 퇴각하였다. 2일간에 걸친 이 사건이 관찰사 민치상(閔致庠)에게 알려지자 즉시 군관 100여 명을 출동시켜 추적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 소식이 중앙에 전해지자 대원군은 양이(洋夷)의 추적을 명하는 동시에, 이러한 괴변은 필시 천주교도의 내응(內應) 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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