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터섬 칠레 서쪽의 남태평양상에 있는 섬. 인구 약 2천(1990). 원지어(原地語)로는 라파누이(Rapa Nui), 에스파냐어로는 파스쿠아(Pascua)라고도 한다. 네덜란드 탐험가인 J.로게벤이 1722년 부활절(Easter day)에 상륙한 데서 이스터섬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20개 가까운 화구가 있는 화산섬으로서 거의 삼각형이다. 토지의 대부분은 칠레 정부가 소유하며, 양과 소의 방목에 이용되고 있다. 수목은 없고 초원이며, 물은 적은 편이다. 고고학상 중요한 섬으로서, 인면석상(人面石像) 등의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유적과 폴리네시아 유일의 문자가 남겨져 있으나, 이것들을 만든 사람들에 대하여는 명확하지 않다. 이 섬으로의 이주는 10세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며, 언어 ·인류학상으로 보아 최초의 주민은 멜라네시아의 피가 섞인 폴리네시아인으로 본다. 1722년 이전에는 최고 4,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으나, 1862년의 노예사냥과, 그에 잇달은 천연두의 유행 등으로 섬의 인구는 최저 111명까지 감소되었다. 1864년 이후에 백인도 정착하게 되고 1888년에 칠레령이 되었다. 현재 서해안의 약 20㎢의 토지는 원주민(토민)들의 보호지로
나린 삶은 고기에 반죽을 얇게 썰어 익힌 국수를 곁들여낸 음식으로, 우즈베키스탄의 전통적인 요리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즐겨 먹는다. 삶은 고기에 국수를 곁들여낸 음식이다. 우즈베키스탄의 전통적인 요리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특히 인기 있는 음식이며 키르기스스탄과 위구르족 등 중앙아시아에서더 즐겨 먹는다. ‘노린(Norin)’이라고도 한다. 나린은 지역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른데, 키르기스스탄의 나린은 본래 고기에 양파 소스로만 구성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국수를 첨가한 구성으로 변형되어 만들어지며, 위구르에서는 잘게 썬 고기를 국수와 섞은 뒤, 양고기 육수를 부어 먹는 방식으로 만든다. 이에 비해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삶은 고기를 잘게 썰어 국수와 함께 섞어낸 기본적인 형태로 나린을 먹는다. 요리에는 전통적으로 말고기가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말고기 외에도 양고기 혹은 소고기가 흔히 사용되며 종종 송아지고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요리에는 카자흐스탄의 말고기 소시지인 카지(Kazy)가 쓰이기도 하는데, 이는 고기와 함께 조리되거나 완성된 요리에 곁들여 먹기도 한다. 나린은 환대의 의미를 갖는 음식으로 이웃에게 대접하기 위해 만들기 때문에 결혼식이나 이드 알피트르와 같은 축제 행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리법 소고기와 양고기를
프로뱅 지역의 중세도시 상가지역 11~13세기 사이에 발달했던 중세 무역도시이자 요새 도시로 모직물 산업으로 유명했다. 중세에 만들어진 거주지 건물, 무역 창고, 종교 건축물, 요새 건축물들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일드프랑스 지방과 샹파뉴 지방 사이에 위치한 프로뱅(Provins)은 예전에는 샹파뉴 백작(Counts of Champagne)령에 속해있던 요새화된 중세도시였다. 12~13세기 동안 수 많은 상인들이 거래를 위해 머물렀던 곳으로 경제적 활기가 넘쳐났다. 이곳에서 열렸던 샹파뉴지방의 시장은 북유럽과 지중해지방을 연결시켰으며 지방 산업이었던 모직물 산업을 크게 확장 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모직물을 팔려는 플랑드르(Flanders) 상인들과 사려는 이탈리아 상인들은 이곳시장에서 만났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11~15세기 동안 지어진 창고, 요새, 교회, 집, 성탑과 같은 중세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2001년 프로뱅은 중세 주요 무역도시이자 요새도시로서의 그 가치와 훌륭한 보존 상태를 인정받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World Heritage)로 선정되었다. 11세기 초 샹파뉴 백작은 그 누구보다 빨리 장거리 무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영지 내에 있던 도시들의 지리적 이점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프로뱅은 주요한 교역로들의 교차지점에 위치한 곳이었다. 따라서 이곳에서 열린 시장은 항상 성황을 이루었고 12~13세기에 가서는 유럽의 주요 무역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지리적 이점만이 프로뱅 지방에 경제적 활기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경주 황룡사지 6세기 신라시대 때 만들어져 고려 13세기 몽고의 침입으로 불 타 없어진 황룡사(皇龍寺)의 절 터.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왕명으로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566년에 주요 전당들이 완성되었고, 금당(金堂)은 584년(진평왕 6)에 완성되었다. 선덕여왕 14년(645년) 탑의 건조까지 모두 완성된 황룡사는 신라의 호국 신앙의 중심지였다. 황룡사 경내에는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었으며 이는 당나라 유학 후 돌아온 승려 자장대사의 건의로 백제의 '아비지'에 의해 3년 만에 완성된 신라의 상징물이었다. 현재 9층 목탑이 서 있던 자리에는 탑을 지탱해 주었던 중앙 기둥 주춧돌인 심초석이 남아 있다. 이 절은 신라 대궐인 월성(月城)이 동쪽에 있었는데, 그 창건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이 새로운 궁을 월성 동쪽 낮은 지대에 건립하려 했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왕이 새로운 궁 건립을 중지하고 절로 만들게 하여 황룡사라는 사명(寺名)을 내렸다고 한다. 국가적인 사찰이었기 때문에 역대 국왕의 거동도 잦았고 신라 국찰 중 제일의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신라 멸망 후에도 황룡사는 고려 왕조에 이어져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으며 9층 탑의 보수를 위해 목재까지 제공받았다. 그러나 1238년(고종 25) 몽골군의 침입으로 탑은 물론 일체의 건물이 불타없어졌다. 황룡사의 건물을 복원하고 황룡사 9층 목탑을 복원하고자 하
참여백과 금산가방어린이집 금산가방어린이집 금산가방어린이집 금산가방어린이집 금산가방어린이집 연혁 1. 1984년: 금산가방어린이집 설립 • 지역 사회의 어린이 교육과 보육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설... 금산가방어린이집(진주) 금산가방어린이집은 금산에 위치한 어린이집으로, 아이들에게 안전하고 창의적인 놀이와 학습 환경을 제공한다.
최신항목 보기 영덕군의 교통 도로 교통 서울까지 357㎞, 부산까지 150㎞, 대구까지 137㎞, 안동까지 82㎞ 거리에 있으며, 고속도로와 국도·지방도 등의 도로망이 연결된다. ... 튀니스의 초기 초기 카르타고 정착지 고대 튀니스에는 카르타고인들이 정착지를 만들어 거주했다. 카르타고인들은 로마인들과 세 번의 전쟁을 치르기로 했으며... 킨샤사의 독립 이후 1959년 시위 이후 1960년 6월 30일 독립을 쟁취하고 파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nba)가 초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루뭄바의 친소련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