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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티무르

중앙아시아 티무르제국의 건설자(재위 1369∼1405). 해마다 사방으로 원정하여 코라즘을 병합하였고 동차가타이 한국을 복종시켰으며 카르토왕조를 멸망시키고 인도에 침입하여 델리를 점령하였다. 학자·문인을 보호하고 산업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게시(현재의 샤흐리사브즈)의 귀족 출신으로, 그 가계(家系)는 칭기즈칸에 이어진다고 전한다. 서차가타이한국(汗國)의 카잔의 딸을 정비(正妃)로 삼았기 때문에 크레겐이라 불리고, 또 시스탄전투에서 오른발을 다쳤기 때문에 '티무르 이랑(절름발이 티무르)'이라고도 불렀으며, 유럽인은 Tamerlane이라 불렀다. 1360년 동차가타이의 칸이 침입했을 때 일단 항복하였으나, 곧 처남 후사인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이를 몰아내었다. 1369년 바르프에서 즉위하고, 1370년 마와란나하르의 군주가 되어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정하였다. 그후 티무르는 매년 각지로 원정하여, 1380년에는 코라즘을 병합하였다. 그리고 5회에 걸쳐 동차가타이한국을 공격하여 마침내 1397년에는 이를 복종시켰다. 이란지방에 대해서는 1380년에 카르토왕조를 멸망시키고, 1393년에는 자라일왕조의 군주 아마드를 바그다드에서 몰아냈다. 한편, 킵차크한국의 토크타미시와 다투어 1395년 테레크 강변에서 이를 크게 격파하고 모스크바 부근까지 진군하였다. 1398년에는 남쪽으로 내려가 인도 북방지역을 공격하였고 마침내 인도 내륙으로 침입하여 델리를 점령하고 많은 재화를 약탈하였다. 이때 오스만투르크제국의 바야지트 1세는 이집트의 맘루크왕조와 협력하여 연합전선을 형성하였으며 아마드를 도와서 서경(西境)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군사를 시리아에서 아나토리아

푸리 바지

푸리 바지

삶은 감자에 야채와 향신료를 첨가하여 만든 건조한 카레와 인도의 전통 빵인 푸리를 곁들여낸 인도의 요리이다. 감자를 넣어 만든 야채 카레에 푸리를 곁들여낸 인도의 요리이다. 인도에서는 아침 식사나 점심 식사로 즐겨 먹으며, 노점상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음식이다. ‘바지(Bhaji)’는 마라티어(Marathi: 마하라슈트라주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야채 혹은 야채를 베이스로 하여 만든 음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푸리 바지에는 으깬 감자를 주재료로 하는 건조한 카레인 알루 바지(Aloo bhaji)가 쓰인다. 이 요리는 푸리말고도 파라타와 난과 같은 다른 인도 빵과도 함께 먹을 수 있다. 푸리 바지는 일반적으로 슬라이스한 양파, 레몬 조각, 코코넛 처트니를 곁들여내며, 인도식 스튜인 달, 인도의 요구르트 샐러드인 라이타(raita) 등과 함께 먹는다. 조리법 껍질을 제거한 감자를 삶아서 조각낸다. 그린 칠리 고추, 생강, 실란트로는 다져 놓고, 양파는 얇게 슬라이스한다. 팬에 오일을 두르고 커민, 머스타드 씨, 우르드, 말린 레드 칠리 고추, 병아리콩을 넣어 볶다가 카레 잎을 넣고 향이 나면 얇게 썬 양파를 넣는다. 그 다음 잘게 썰어둔 그린 칠리 고추와 생강, 감자를 넣는다. 터메릭 파우더와 물 약간,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추고 감자를 살짝 으깬 뒤 약 4분

알칼라 데 에나레스대학 및 역사지구

알칼라 데 에나레스대학 및 역사지구

스페인 마드리드자치구 알칼라데에라네스에 있는 역사도시 유적.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중세 대학도시 건축물이 보존되어 있어 1998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알칼라 데 에나레스는 프란시스코 히메네즈 데 시스네로스(Francisco Jiménez de Cisneros) 추기경이 16세기에 설립하였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계획된 대학도시로서 나중에 에스파냐인들이 아메리카대륙에 세운 도시 공동체의 전형이 되었다. ‘에스파냐 문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중세식의 구불구불한 자갈길로 이루어진 도시 중심부에는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알칼라데에나레스대학교는 1516~1520년에 건축하였다. 플라테레스코 양식으로 지어 총장의 거처로 사용된 콜레히오 마요르(Colegio Mayor)를 중심으로 하여 산타 카탈리나(Santa Catalina), 산 에우헤니오(San Eugenio), 산타 발비나(Santa Balbina), 산 이시도로(San Isidoro), 마드레 데 디오스(Madre de Dios) 등의 5개 단과대학으로 설립하였으며 나중에는 총 33개의 단과대학이 들어섰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쇠퇴하였으나 1977년부터 다시 개교하였다. 해마다 4월 23일이면 대학의 대강당 파라닌포(Paraninfo)에서 에스파냐 최고의 문학상인 세르반테스문학상의 수상식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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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정조

조선 제22대 왕(재위 1776~1800).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다. 전제(田制)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출생과 세손책봉 이름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며 1752년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장조)의 아들로 출생했다. 할아버지는 영조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惠嬪, 헌경왕후)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1775년(영조 51) 12월 노병이 깊어진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당시 좌의정이자 외척인 홍인한(洪麟漢)이 이를 방해하여 조정이 한때 크게 소란스러웠다.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위치였으나, 세손이 멀리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로 권세를 부리던 정후겸(鄭厚謙)과 연대하여 세손에게는 정치적 정적이 되었다. 홍인한은 세손을 고립시키기 위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궁료 홍국영(洪國榮)·정민시(鄭民始) 등을 참소하기까지 했으나 세손이 이를 듣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손이 대청(代聽)의 명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조선 22대 왕위 승계와 정치적 상황 1776년 3월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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