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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토쿠태자

쇼토쿠태자

일본에 불교를 중흥시킨 인물. 6세기 후반에 용명천황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구려승 혜자와 백제승 혜총으로부터 불교를 배웠으며 법륭사(法隆寺)를 지었다. 6세기 후반에 용명천황(用明天皇)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최초의 절 법흥사(法興寺:593년 창건)에서 고구려승 혜자(惠慈)와 백제승 혜총(惠聰)으로부터 불교를 배웠다. 일본에는 538년 불교가 전래되어 공인되긴 하였으나 토착 종교인 신도(神道)가 성행하였고, 유교도 도입되어 생활규범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특히 성덕태자 시절의 조정은 배불파와 숭불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용명천황이 죽자 두 파간에 투쟁이 벌어졌는데, 숭불파인 소가씨를 지원하여 승리하였다. 일본이 불교국가로 자리잡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불교를 포교하기 위하여 사재를 털어 법륭사(法隆寺)를 지었고, 17조헌법을 만들어 삼보를 공경할 것을 명하고 선악의 도리로 불교를 채택하였다. 또한 606년(추고 천황 14)에는 《승만경》과 《묘법연화경》을 강의하여 천황으로부터 파마국의 수전(水田) 100정을 희사받기도 하였다. 그는 이를 반구사에 헌납하였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전해진다. 《법왕제설(法王諸說)》7에 의하면, 태자가 혜자에게 불교를 배워 불교를 융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불교만을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불교를 중심으로 토착 종교인 신도와 유교의 좋은 점을 모으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신불유습합사상(神佛儒習合思想)이라 하며 좋은 점은 재빨리 받아들이는 일본인의 독특한 사상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는 또한 1

라브리

라브리

우유를 설탕, 향신료, 견과류와 함께 뭉근히 끓여내어 만든 달콤한 맛에 크림과 같은 질감을 가진 디저트로, 인도 북부지역의 전통적이고 인기 있는 요리이다. 우유, 설탕, 향신료, 견과류를 첨가하여 만든 디저트이다. 인도 북부지역에서 인기 있는 요리이며, 달콤한 맛에 크림과 같은 질감을 갖는다. ‘라차 라브리(Lachha rabri)’라고도 한다. 카르다몸, 사프란, 로즈 워터 혹은 판단 추출물로 향미를 내고, 아몬드나 피스타치오와 같은 견과류를 첨가하여 만든다. 라브리는 전통적으로 웍과 유사한 형태를 띠는 인도의 팬인 카다이(Kadai)에서 만드는데 이는 면적이 넓은 팬에서 우유를 끓이는 것이 우유의 증발을 도와주고, 팬 바닥이 두꺼워 우유가 타는 것을 방지하여 주기 때문이다. 라브리는 차갑게 먹기도 하고 따듯하게 먹기도 하며, 굴랍자문, 잘레비, 인도식 팬케이크인 말푸아(Malpua), 인도의 전통 빵인 푸리 등과 함께 먹는다. 조리법 카다이에 우유를 담고 낮은 불에서 끓인다. 우유 윗부분에 크림같은 질감의 층이 형성되면 팬의 가장자리 옆면에 옮긴다. 이 과정을 반복하여 우유에 생성된 크림층을 팬 옆면에 붙여둔다. 아몬드와 피스타치오는 뜨거운 물에 담가두었다가 껍질을 제거하고 잘게 다진다. 우유가 반으로 줄어들면 설탕, 으깬 사프란, 카르다몸 파우더를 넣어 가볍게 젓는다. 우유가 더 졸아들면 불을 끄고 팬 옆면에 옮겨두었던 우유의 크림 층을 긁어내어 졸아든 우유와 함께 섞는다. 여기에 다진 아몬드, 피스타치오, 로즈 워터 혹은 다운 판단 추출물을 넣고 섞는

탈린 역사지구(옛 시가지)

탈린 역사지구(옛 시가지)

13세기 십자군기사단에 의해 세워진 성채도시이며 한자동맹의 주요도시로 화려한 공공건물과 상업시설들로 유명하다. 탈린(Tallinn)은 발트해의 핀란드만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로 발트 3국 중의 하나인 에스토니아 수도다. 자갈로 된 거리, 중세풍의 건물과 성벽이 있는 구시가는 1997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탈린은 ‘덴마크인이 만든 도시’라는 뜻이며, 실제로 11세기 덴마크인들에 의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 13세기에는 한자동맹의 중심도시로 2세기 동안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5세기 이후에는 스웨덴, 러시아, 독일 등 주변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았다. 2차 대전 후에는 구소련의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가 1991년에 독립하였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탈린의 구시가는 상인과 일반인들의 거리인 저지대와 영주나 귀족 등 ‘가진 자’들의 구역인 고지대로 크게 나뉜다. 쌍둥이 탑을 통과해서 구시가로 들어가면 먼저 고딕양식의 구시청사와 그 앞의 시청광장이 있다. 구시청사는 북유럽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딕식 건물로 역사박물관과 콘서트홀 등으로 활용되며,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도 있다. 시청광장의 마기스트라트 약국은 1422년 문을 열어 한 집안이 10대에 걸쳐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광장 남쪽에는 니글리스테 교회가 있는데, 13세기에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가 17세기 바로크 양식 개조한 곳이다. 탈린 중심부에 있는 톰페아 언덕에는 주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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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

1894~1895년 반봉건·반외세를 기치로 하여 농민을 중심으로 일어난 혁명. 동학의 창시와 교조신원운동 동학(東學)은 1860년(철종 11) 최제우(崔濟愚)가 창시한 종교로, 서학(西學)에 대립하여 동쪽 나라에서 도(道)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19세기 후반 조선 사회는 매우 혼란하였다. 세도정치로 인하여 통치 기강이 해이해지고, 조세제도의 운영은 문란해졌으며 자연재해까지 더해졌다. 또한 이양선(異樣船)이 자주 출몰하며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까지 높아졌다. 이러한 사회상 속에서 농민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의지할 대상이 필요한 상황에서 동학이 창시되었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기반으로 인간평등과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주장하여 많은 사람이 이를 따랐다. 1860년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여 포교를 시작한 뒤 경상도 일대에 동학교도가 빠르게 늘어났다. 그러나 1864년 1월 최제우가 세상을 어지럽혔다는 죄로 체포되어 4월 대구에서 처형된 후, 최시형(崔時亨)이 동학의 실질적 지도자가 되었으며, 동학은 지하에서 포교를 이어나갔다. 1880년대 들어선 후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등이 일어나며 조정이 혼란해지자, 동학의 교세는 다시 확장되었다. 1890년대 확장된 교세 속에서 동학교도들은 동학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벌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동학교도들은 계획을 변경하여 1893년(고종 30) 2월 11일 광화문(光化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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