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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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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말~11세기 초 해상으로부터 유럽 ·러시아 등에 침입한 노르만족(북게르만족). 원래는 고국땅인 스칸디나비아에서 덴마크에 걸쳐 많이 있는 협강(vik)에서 유래한 말로 ‘협강에서 온 자’란 뜻이다. 전투(vig), 성채화된 숙영지(wik), 해적(viking) 등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아직 정설은 없다. 이 무렵에 그들이 각지에 진출한 원인은 인구증가에 의한 토지의 협소화 때문이며, 한랭하고 메마른 땅에서 온난하고 비옥한 땅을 얻기 위하여 감행한 민족대이동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노르만족은 씨족제(氏族制)사회가 해체되고 계급사회로 이행하여 국가형성기에 이르는 과도기로서, 부족 간의 항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족장(族長)이 부족민을 인솔하여 해외로 신천지를 찾아 진출한 경우가 많았다. 일찍부터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그들에게 전쟁과 모험, 전리품의 갈망 등은 해외진출을 더욱 촉진하였다. 무자비한 침입·싸움·약탈 등으로 ‘해적 민족’으로서 각지의 공포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해적행위는 민족이동뿐 아니라 전투·정복·탐험·식민·교역 등 다양한 활동을 초래하였다. 근년에 유적·유물의 발굴과 조사 및 여러 과학의 총합적 연구에 의해 파괴적인 바이킹관(觀)은 상당히 수정되어, 중세 유럽사(史)의 전 영역에 커다란 영향을 준 장대한 운동으로서 보게 되었다.

보라니

보라니

양파와 볶은 시금치를 요구르트 등과 버무려낸 음식으로, 이란의 전통적인 요리이며 페르시아계 유대인들이 즐겨 먹는다. 시금치와 요구르트 등을 재료로 하여 만든 이란의 전통적인 전채 요리이다. 페르시아계 유대인들이 주로 먹으며 튀르키예 일부 지역에서도 즐겨 먹는다. ‘마사트 에 에스파나즈(Mast e esfanaj)’라고도 한다. 오순절, 부활절, 하누카에 쓰이는 음식이며 일반적으로는 여름에 주로 먹는다. 몇몇 지역에서는 보라니에 오이나 가지, 사탕무, 셀러리, 민트, 양파 등의 다양한 향채를 첨가하기도 한다. 튀르키예에서는 버터에 볶은 향신료를 요리에 올리거나 천도복숭아와 함께 먹기도 한다. 보라니는 빵에 곁들여 먹거나, 그릴에 구운 고기나 야채 등에 곁들여 먹기도 한다. 가니쉬로는 견과류나 튀긴 양파를 올릴 수 있다.  조리법 시금치는 줄기를 떼어 잘게 썰고 양파와 마늘도 잘게 썰어 놓는다. 냄비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양파를 넣어 갈색을 띨 때까지 볶아주다가 다진 마늘과 시금치를 넣어 약 10분간 볶는다. 불을 끄고 시금치를 볼에 담은 뒤 요구르트, 소금, 후추를 넣고 섞는다. 이것을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먹기 전에 바로 꺼내서 가니쉬로 호두를 올려낸다. 완성된 보라니는 전채 요리로 먹는다.

베르사유 궁전과 공원

베르사유 궁전과 공원

프랑스 일드프랑스 지역의 베르사유에 있는 바로크양식의 궁전으로 본래 루이 13세가 사냥용으로 지은 별장을 루이 14세가 증축하여 1685년에 완성되었다. 절대왕정의 산물로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어 현재는 관광지로 이용된다.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짐은 곧 국가’라고 말했던 태양왕 루이 14세가 지은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물이다. 바로크 양식의 대궁전으로 건물 자체는 물론 내부장식과 부르봉 왕가의 유물과 소장품들, 궁전의 정원까지 당대의 화려함을 엿 볼 수 있다. 애초 루이 13세가 지은 작은 사냥용 별장을 루이 14세가 광대한 정원을 갖춘 대궁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루이 르 보(Louis Le Vau)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이 건물 설계를 맡고, 천재적인 조경사 앙드레 르 노트르(Andre Le Notre)가 정원 설계를 맡았다. 2만 명의 인원에 50년이 넘는 대공사 끝에 태양왕이 72세 되던 해에 완성되었다. 총길이 680m에 남북에 별관을 설치해 대칭형으로 지은 궁전은 이후 유럽 많은 군주들의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궁전은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절대왕정의 상징물로 약탈과 파괴의 대상이 되었으나, 현재는 관광지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베르사유 궁전은 웅장한 외관 못지 않게 화려한 내부로 유명하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7개의 대형 거울이 설치된 ‘거울의 방’이다. 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3m인 이 방의 천장은 프레스코화로 덮여 있고, 곳곳에 대형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이외에도 말을 타고 적과 싸우는 루이 14세의 커다란 부조가 있는 ‘전쟁의 방’, 루이 14세의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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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배

최현배

한글학자로 호는 외솔이다. 조선어학회 창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에 참여,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복역하였다. 광복 후 교과서 행정의 기틀을 잡았다. 연세대학교 부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는《우리말본》,《한글갈》,《글자의 혁명》등이다. 본관 경주(慶州). 호 외솔. 1894년 10월 19일 경남 울산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인 1910년부터 3년간 주시경(周時經)의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과 문법을 배웠다. 1919년 일본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원자격증을 받았으나 관공립고등보통학교 교원을 사퇴하고 고향에서 휴양하면서 조선인 상권(商權) 확보를 위하여 공동상회(共同商會)를 설립하였다. 1920년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1922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연구과에 다시 수학, 이어서 교토[京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1925년 동대학원에서 1년간 수업하였다. 1926년 연희전문 교수가 되고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강제 사직하였다. 그 동안 이화여자전문 교수도 겸직하였는데 실직한 동안 한글 연구의 완성을 위해 《한글갈[正音學]》을 발간하였고 1941년 연희전문에 복직, 도서관에 근무하였다. 조선어학회 창립에 참여하고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준비위원이 되었으며,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42년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8·15광복 때까지 3년간 복역하였다. 8·15광복 후 미군정청 편수국장에 취임하여 교과서 행정을 담당, 그 기틀을 잡았으며 이어 한글학회 상무이사·이사장 등을 지냈다. 1951년 다시 문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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