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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

찰스 다윈

생물진화론을 정하여 뜻을 세운 영국의 생물학자이다. 해군측량선 비글호에 박물학자로서 승선하여, 남아메리카·남태평양의 여러 섬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을 항해·탐사했고 그 관찰기록을 《비글호 항해기》로 출판하여 진화론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1859년에 진화론에 관한 자료를 정리한 《종(種)의 기원(起原)》이라는 저작을 통해 진화사상을 공개 발표하였다. 생물진화론의 정립에 공헌하였다. 슈루스베리의 의사 로버트 다윈의 아들이며, 에라스머스 다윈의 손자로 태어났다. 1825년 에든버러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배웠으나 성격에 맞지 않아 중퇴하였다. 1828년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어릴 때부터 동식물에 관심을 가졌고, 케임브리지대학의 식물학 교수 J.헨슬로와 친교를 맺어 그 분야의 지도를 받았다. 1831년 22세 때 헨슬로의 권고로 해군측량선 비글호에 박물학자로서 승선하여, 남아메리카 ·남태평양의 여러 섬(특히 갈라파고스제도)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를 두루 항해 ·탐사하고 1836년에 귀국하였다. 그 동안에 널리 동식물의 상(相)이나 지질(地質) 등을 조사하여 후에 진화론을 제창하는 데 기초가 되는 자료를 모았다. 특히 갈라파고스제도에서의 관찰, 즉 다른 환경의 섬과 거기에서 생활하는 같은 계통의 생물에서 볼 수 있는 사소한 변이(變異)와의 관련은, 다윈으로 하여금 진화사상의 심증을 굳히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또, C.라이엘의 《지질학 원리》도 큰 영향을 주었다. 1839년 《비글호 항해기 Journal of the Voyage of the Beagle》를 출판하여, 여행 중의 관찰기록을 발표하면서 진화론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또한 지질학상의 문제, 산호초의 생성원인의 연구에 착수하였다. 1842년에는 건강 때문에 켄트주(州)에 은거하여 진화론에 관한 자료를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의 백색 기념물군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의 백색 기념물군

러시아의 서부 블라디미르와 수즈달 두 도시에 있는 중세 석회암 건축물들이다. 대부분 성채, 교회, 수도원으로 지어졌으며 중세 러시아의 건축 양식과 예술의 발전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유럽 동부에서 아시아 북부 지방까지 넓게 걸쳐 있는 국가 러시아(Russia)의 세계유산이다. 러시아 서부 블라디미르 주(Vladimir Oblast)에 위치한 두 도시 블라디미르(Vladimir)와 수즈달(Suzdal)에 자리 잡고 있다. 블라디미르는 블라디미르 주의 중심 도시로 수도 모스크바(Moscow)에서 동쪽으로 200km 떨어져 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수즈달은 블라디미르에서 26km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은 중앙 러시아의 예술 중심지로 국가의 건축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화려하고 장대한 공공건물과 종교 건물들은 보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세계 유산으로 등록된 중세 석회암 건축물은 총 8개이다.  성 데메트리우스 성당(the Cathedral of Saint Demetrius)과  성모 몽소승천 성당(Cathedral of the Assumption of the Virgin), 황금 문(Golden Gate), 안드레이 보골류프스키 성(The castle of Andrey Bogolyubsky), 네를 성모 마리아 교회(Church of the Intercession of the Holy Vir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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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이준

한말의 항일애국지사.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개혁당, 대한보안회, 공진회,헌정연구회 등을 조직했다. 보광,오성학교를 세웠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위종 등과 합류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참석 못하고 순국했다. 호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 본명 순칠(舜七). 초명 성재(性在)·여천(汝天)·선재(璿在).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출생하였다. 29세에 북청에서 초시(初試)에 합격, 1894년(고종 31) 함흥 순릉참봉(純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상경, 이듬해 신설된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들어가 6개월 후에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보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조신(朝臣)들의 불법과 비행을 들추어 파헤치다가 그들의 면관(免官) 운동 때문에 취임 1개월 만에 면직되고 곧 독립협회에 가담, 평의장(評議長)으로 활약하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7년(광무 1)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에 들어가 이듬해 졸업하고 귀국, 다시 독립협회 일을 보다가 무고로 간부 17명과 함께 피체, 수개월 후 석방되었다. 1899년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되자 민영환(閔泳煥)·이동휘(李東輝)·이상재(李商在) 등과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 러일전쟁 후 일제의 한국침략과 친일 주구(走狗)들의 활동이 노골화하자 대한보안회(大韓保安會)를 조직하여 황무지 개척권을 얻으려는 일제의 음모를 폭로하고 일진회(一進會)와 대항하여 공진회(共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었다. 친일대신(親日大臣) 5명을 성토하다가 피체, 철도(鐵島)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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