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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대학살

난징대학살

1937년 중일전쟁 때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저지른 대규모 학살사건. 개요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국민정부(國民政府)의 수도였던 난징(南京)을 점령한 뒤 이듬해 2월까지 대량학살과 강간, 방화 등을 저지른 사건을 가리키며, 중국에서는 ‘난징대도살(南京大屠殺)’, 일본에서는 ‘난징사건(南京事件)’이라고 한다. 정확한 피해자 숫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약 6주 동안 일본군에게 2~30만 명의 중국인이 잔인하게 학살되었으며,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의 수도 2~8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일본군의 방화와 약탈로 난징시 안의 건축물약 23.8%가 불에 타고, 88.5%가 파괴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 밖에 일본군은 상하이(上海)·항저우(杭州)·쑤저우(蘇州)·우시(無錫)·우후(芜湖)·양저우(楊州) 등 중국 장쑤성(江蘇省)과 저장성(浙江省) 일대의 주요도시들에서도 학살과 약탈을 자행해 적어도 3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고, 수많은 강간 피해자들이 발생했다. 경과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그해 11월 상하이를 점령하고 장제스(蔣介石)가 수반이었던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 공격에 나섰다. 국민정부는 곧바로 난징을 포기하고 우한(武漢)을 거쳐 충칭(重慶)으로 피신했으나, 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 장군은 항전을 주장하며 일본군의 투항 요구를 거절했다. 일본군은 그해 12월 10일 난징 공격을 시작한 뒤 3일 만인 12월 13일

참피노네스 아 라 세고비아나

참피노네스 아 라 세고비아나

스페인 세고비아 스타일의 버섯 요리로, 버섯과 베이컨, 마늘을 한데 섞어 볶아낸 뒤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을 넣어 만든다. 전채요리인 타파스로 즐겨 먹는다. 버섯, 베이컨, 마늘,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 등을 한데 넣어 볶아낸 스페인의 요리로, 카스티야 지방의 세고비아에서 유래하였다. 이때 스페인어로 참피뇽(champiñón)은 버섯을, 세고비아나(segoviana)는 ‘세고비아(Segovia)풍의’라는 뜻이다. 이때 주재료인 버섯은 양송이를 활용하여 만들며, 크기가 큰 것은 반으로 자르거나 사등분 하여 요리에 첨가한다. 스페인에서 전채요리인 타파스로 즐겨 먹는 음식이다. 조리법 양송이는 깨끗하게 손질하여 반으로 자르거나 사등분한다. 베이컨은 큐브 모양으로 작게 잘라 놓고, 마늘은 잘게 다져 놓는다. 냄비에 베이컨을 넣어 볶다가, 마늘, 파슬리, 양송이를 넣어 볶는다.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 소금, 후추를 넣어 센 불에서 볶아 요리를 완성한다. 완성된 참피노네스 아 라 세고비아나는 따듯할 때 대접하여 슬라이스한 바게트 등과 함께 먹는다. 영양정보 주재료인 버섯에는 기본적으로 철, 아연, 비타민이 풍부하여 성장기 어린이에게 도움이 되며, 식이섬유가 다량 함유되어 있어 칼로리가 낮은데도 불구하고 쉽게 포만감을 주어 체중조절시 도움이 된다.<

쿠엥카 성곽도시

쿠엥카 성곽도시

스페인 카스티야라만차(Castile-La Mancha) 자치주 쿠엥카 지방에 있는 역사도시 유적. 독특한 지형을 이용하여 건설한 중세 요새도시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1996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베리아반도의 메세타 남동부 해발 900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9세기 무렵 이곳을 점령한 이슬람교도들이 후카르(Júcar)강과 우에카르(Huécar)강 사이의 언덕 위에 세운 요새였으나 뒤에 도시로 발달하여 후(後)우마이야왕조의 거점이 되었다. 이후 1177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Alfonso XIII)가 다시 점령하였고 1189년에는 주교좌가 설치되어 카스티야의 종교·행정·경제의 중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도시의 전성기인 16세기에는 인구가 1만 6,000명에 이르렀으며 도시의 영역도 더욱 넓어졌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요새에는 수도원과 성당이 들어섰고 요새 안에 거주하던 상류계층은 낮은 도시 중심부로 이주하였다. 17세기에 들어서자 경제의 기초를 이루던 직물업의 쇠퇴로 인구가 4,000여 명으로 줄어들었으나, 도시의 종교적인 역할은 더욱 커졌다. 17세기 후반부터 도시를 재건, 복구하였으며 1940년대 이후에는 본격적인 복원작업을 시행하였다. 요새도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옛시가지에는 성당과 수도원 등의 종교건축물과 귀족들의 저택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13세기 중반에 고딕 양식으로 건립된 쿠엥카대성당, 산미겔성당(Church San Miguel), 18세기에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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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김좌진

한국의 독립운동가. 1920년 10월 청산리(靑山里)계곡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1889년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김형규(金衡奎)이며 둘째 아들이다. 집안은 부유한 명문대가 였으며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광무 9)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융희 1)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서북학회의 산하교육기관인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다. 1915년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회에 가입했고,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도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면소판정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대한광복회 조직이 와해되면서 체포 위기에 처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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