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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리빙스턴

데이비드 리빙스턴

19세기 영국의 선교사·남아프리카 탐험가. 빅토리아폭포와 잠베지강을 발견하였다. 켈리마네 주재 영국 영사로, 니아사호 등을 탐험, ‘노예사냥’ 실태를 폭로함으로써, 노예무역 금지에 이바지하였다. 저서《남아프리카 전도여행기》등이 있다. 스코틀랜드의 블랜타이어 출생. 가난하여 글래스고 인근의 방적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하면서 고학으로 글래스고대학에서 그리스어(語) ·신학 ·의학을 배웠다. 1840년 런던 전도협회의 의료선교사로서 남아프리카에 파견되어, 1841년부터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오지에까지 들어가 전도사업에 진력하였는데, 뒤에는 교역 루트 탐색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852∼1856년에는 케이프타운을 출발하여 육로로 서안(西岸)의 루안다를 거쳐 대륙을 횡단하여 동안(東岸)의 켈리마네까지 이르러 아프리카 횡단여행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때 빅토리아폭포와 잠베지강(江)을 발견하였다. 1856년 귀국하여 《남아프리카 전도여행기: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2권, 1857)를 출간하고, 1858년 켈리마네 주재 영국 영사로 부임하여 니아사호(湖:말라위) 등을 탐험, 인근의 ‘노예사냥’ 실태를 폭로함으로써, 노예무역 금지에 이바지하였다. 1864년 다시 귀국하여 《잠베지강과 그 지류:Zambesi and its Tributaries》(2권, 1865)를 발간하고, 1866년에 다시 아프리카로 건너가 나일강의 수원조사에 착수하였다. 1871년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콩고강 지류에 이르렀으나 열병에 걸려

에스토파도 데 바카

에스토파도 데 바카

소고기, 감자, 향신료 등을 첨가하여 뭉근하게 끓여낸 스페인의 스튜 요리이다. 소고기를 주재료로 하여 만든 스페인식 스튜이다. 스페인어로 ‘에스토파도(estofado)’는 ‘약한 불로 찐’이라는 의미를, ‘바카(vaca)’는 ‘소고기’를 의미한다. 주재료인 소고기는 양지머리를 활용하는 것이 좋으며, 그 밖의 재료로는 감자, 당근, 양파, 마늘 등의 야채와 오레가노, 월계수잎, 후추, 파프리카 가루 등의 향신료가 들어간다. 취향에 따라 콩, 토마토, 베이컨, 라드(lard) 등이 첨가되기도 한다. 완성된 에스토파도 데 바카에는 삶은 흰쌀을 곁들여 먹기도 한다. 조리법 소고기 양지머리를 준비하여 깍둑썰기한다. 감자도 껍질을 벗겨 깍둑썰기한다. 양파는 슬라이스하여 준비한다. 큰 냄비에 소고기 육수, 화이트 와인, 화이트 와인 식초, 럼,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오일, 마늘, 양파, 월계수잎, 오레가노, 소금, 설탕, 후추, 파프리카 가루, 소고기를 넣는다. 강불에서 20분간 끓인다. 육수가 끓기 시작하면 불을 낮춘 뒤 뚜껑을 덮고 1시간 반에서 2시간가량 고기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끓여준다. 요리가 완성되기 약 30분 전에 잘라놓은 감자, 당근을 넣어 끓인다. 이때 감자는 스튜에 첨가하지 않고 따로 구워서 요리에 곁들이기도 한다. 여기에 신선한 파슬리를 넣는다. 완성된 에스토파도 데 바카는 토기

탈린 역사지구(옛 시가지)

탈린 역사지구(옛 시가지)

13세기 십자군기사단에 의해 세워진 성채도시이며 한자동맹의 주요도시로 화려한 공공건물과 상업시설들로 유명하다. 탈린(Tallinn)은 발트해의 핀란드만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로 발트 3국 중의 하나인 에스토니아 수도다. 자갈로 된 거리, 중세풍의 건물과 성벽이 있는 구시가는 1997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탈린은 ‘덴마크인이 만든 도시’라는 뜻이며, 실제로 11세기 덴마크인들에 의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 13세기에는 한자동맹의 중심도시로 2세기 동안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5세기 이후에는 스웨덴, 러시아, 독일 등 주변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았다. 2차 대전 후에는 구소련의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가 1991년에 독립하였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탈린의 구시가는 상인과 일반인들의 거리인 저지대와 영주나 귀족 등 ‘가진 자’들의 구역인 고지대로 크게 나뉜다. 쌍둥이 탑을 통과해서 구시가로 들어가면 먼저 고딕양식의 구시청사와 그 앞의 시청광장이 있다. 구시청사는 북유럽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딕식 건물로 역사박물관과 콘서트홀 등으로 활용되며,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도 있다. 시청광장의 마기스트라트 약국은 1422년 문을 열어 한 집안이 10대에 걸쳐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광장 남쪽에는 니글리스테 교회가 있는데, 13세기에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가 17세기 바로크 양식 개조한 곳이다. 탈린 중심부에 있는 톰페아 언덕에는 주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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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이·망소이의 난

망이·망소이의 난

고려 정중부(鄭仲夫) 집권기에 충남 공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민중봉기. 정치혼란과 민란의 발생12세기 말 고려시대 무신란(武臣亂)에 의한 무신정권이 출현하면서 권력다툼이 치열해지자 국가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곳에 사회질서가 극도로 문란해지고, 지방에서는 관리의 부정부패로 일반 백성들의 고통은 커져갔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졌고 곳곳에 크고작은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1차 민란1176년(명종 6) 1월, 공주에 딸린 천민부락 명학소(鳴鶴所)에 살던 망이 ·망소이 등은 도당을 모아 자칭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고 부르고 봉기하여, 본읍인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회유로 민란 진압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군 정황재(丁黃載)에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토벌하게 하였으나 패하자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그들이 사는 천민부락의 지위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키고 현령(縣令)을 파견하였음에도 응하지 않고 예산(禮山)을 공략해서 감무(監務)를 살해하였다. 망이 ·망소이 등은 계속 난동을 하다가 1177년 1월에 항복하였고, 조정에서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곡식을 주고 고향으로 호송하였다. 2차 민란그러나 망이는 2월에 다시 난을 일으켜 서산(瑞山)의 가야사(伽倻寺)를 점거하고 3월에는 직산(稷山)의 홍경원(弘慶院)을 불태워 승려 10여 명을 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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