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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의 무장 ·정치가.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던 중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일본통일을 이룩했다.
오와리국[尾張國:愛知縣]에서 태어났다.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29세 이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하였다가,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 간파쿠[關白]가 되어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혼노지[本能寺]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다이라[平]씨를 성씨로 사용하였으며 1585년 관백(關白)이 되자 후지와라[藤原]씨로 성을 다시 바꾸었다.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씨는 1586년부터 사용하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한 그는 1590년 반대세력을 모두 굴복시키고 일본을 통일함으로써 모모야마[桃山]시대를 열었다. 1593년 농민들에게서 무기를 몰 수 하였고 관리를 파견하여 모든 토지를 조사하였다. 농민들은 이제 농사를 짓는 일에만 집중하고 무사가 되거나 다이묘가 되겠다는 의도를 가질 수 없도록 하였다. 또한 무사와 농민의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강력한 지배력을 확보하였다. 이로 인하여 농업기술의 발전과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당시 세금은 쌀로 징수 되었기 때문에 많은 물자가 이동하였고 이를 담당하는 상인들은 많은 재산을 모을 수

피레네산맥-몽페르뒤산

피레네산맥-몽페르뒤산

피레네 산맥 중앙에 위치한 산악지형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두 나라에 걸쳐 있다. 다양한 동식물군과 고산지대 고유종의 서식지로 유명하다. 산악지대 특유의 자연 풍경과 남부유럽의 전통 이동목축(移動牧畜)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것을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에 의해 1997년 총 30,697ha에 이르는 피레네 산맥(Pyrenees) 중앙 지역이세계유산(World Heritage Site)으로 선정되었다. 이 후 1999년 그 범위가 31,189ha로 확대되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 지역은 프랑스와 스페인 두 나라 국경 사이에 걸쳐 있는 곳으로 스페인의 ‘오르데사-몬테 페르디도 국립공원(Ordesa y Monte Perdido National Park, 1918년 설립)’ 전체와  프랑스의 ‘피레네 서부 국립공원(Pyrénées Occidentales National Park, 1967년 설립)'의 동쪽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석회암(石灰巖) 단층지괴(斷層地塊)인 이 지역에는 크고 깊은 계곡들과 인상적인 빙하 침식 지형인 권곡(圈谷, cirque)이 있다. 또한 호수, 폭포, 동굴, 숲 등이 산비탈을 따라 펼쳐져 있다. 지형학적으로 이 지역의 지형은 크게 3개로 나뉘는데 북쪽의 권곡(圈谷)과 계곡 지대, 20km 이상 뻗어있는 경사 급한 석회암지대(높이 3000m이상), 남쪽에 사암(砂巖)과 편암(片巖)으로 이루어진 고원지대(高原地帶)가 그것이다. 이러한 산악지형의 독특한 환경은 이 지역에 뛰어난 자연 풍경을 만들어 주었고 그것은 세계자연유산(Natural World Heritage Site)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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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

이일

조선 중기의 무신. 이탕개가 침입하자 이를 격퇴했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병과 평양을 수복했다. 서울 탈환 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좌지사로 군대를 훈련했다. 본관 용인(龍仁). 자 중경(重卿). 시호 장양(壯襄). 1558년(명종 13) 무과에 급제, 전라도수군절도사로 있다가, 1583년(선조 16) 이탕개(尼湯介)가 경원(慶源)과 종성(鐘城)에 침입하자 경원부사(慶源府使)가 되어 이를 격퇴하였다. 1586년 이탕개가 재차 회령(會寧)에 침공하자 회령부사(會寧府使)로서 그 본거지를 소탕하는 등 공을 세워 함북병마절도사가 되고 김종서(金宗瑞)의 《제승방략(制勝方略)》을 증보하였다. 1587년 북병사(北兵使)로 있을 때에는 둔전(屯田)을 경작하던 녹둔도(鹿屯島)에서 추수를 하다가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패배한 책임을 물어 경흥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을 구금하고, 병력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가 여진족의 근거지에 보복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순변사(巡邊使)로 상주(尙州) ·충주(忠州)에서 왜군과 싸워 패배하였다. 그 후 임진강 ·평양 등을 방어하고 동변방어사(東邊防禦使)가 되었다.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 때 명나라 원병과 평양을 수복하였다. 서울 탈환 후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자 좌지사(左知事)로 군대를 훈련했고, 후에 함북 순변사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3도 순변사를 거쳐 무용대장(武勇大將)을 지냈다. 1600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1601년 부하를 죽이고 살인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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