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통합검색

메인 주요 글

주요 아티클

동방정교회

동방정교회

비잔틴 제국 그리스도 교회의 맥을 잇는 교회로 로마가톨릭, 프로테스탄트와 함께 그리스도교의 3대 분파로 꼽힌다. 주로 러시아, 발칸반도, 서아시아 지역 등에 분포한다. 서방(라틴) 교회의 상대적 의미로 동방교회라 호칭되지만 더 깊은 뜻은 죽음에서 부활한 빛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빛나는 태양이 동방(東方)에서 떠오른다는 데 있다. 파스카(Πασχα)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서방에서는 아직도 ‘East Day’(동방의 날)라고 한다. 동방정교회라고 할 때 정(正:Orthodox)이란 사도전통 ·교부전통의 올바른 가르침, 올바른 믿음, 올바른 예배의 의미를 지닌다. 동방정교회는 보편적 신앙의 교회이므로 그냥 정교회(Orthodox Church)라고 부르는 것이 정상이다. 정교회에서는 세계공의회(世界公議會:Ecumenical Council)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한다. 주교들은 신앙의 문제를 결정할 때 전체교회의 승인과 동의를 받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그래야만 공의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이 확실히 인정되는 것이다. 일곱공의회 비잔틴 제국 일곱 공의회, 즉 325년의 제1차 니케아 공의회, 381년의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431년의 제3차 에페소스 공의회, 451년의 제4차 칼케돈(할키돈) 공의회, 553년의 제5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680년의 제6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787년의 제7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 일곱 공의회에서 결정된 주요내용은 먼저 교회의 신조(Creed:니케아 ·콘스탄

파스텔 아스테카

파스텔 아스테카

튀긴 옥수수 토르티야 사이에 고기, 야채, 치즈, 소스 등을 층층이 쌓아 올린 뒤 구워낸 멕시코의 전통요리이다. 옥수수 토르티야를 튀겨낸 뒤 그 사이를 고기, 야채, 치즈, 소스 등으로 층층이 쌓아 올린 뒤 오븐에 구워낸 음식이다. 이때 스페인어로 파스텔(pastel)은 ‘파이’를, 아스테카(asteca)는 ‘아스떼까 족의’라는 뜻을 갖는다. 부딘 아스테카(Budín Azteca)라고도 한다. 전통적으로 기름에 튀겨낸 옥수수 토르티야가 활용되는데, 최근에는 토르티야를 튀기는 과정을 생략하기도 한다. 속재료로는 잘게 찢은 돼지고기나 소고기, 닭고기를 약불에서 조린 것과 야채, 치즈 등이 첨가된다. 음식 사이사이에 첨가되는 소스로는 토마토, 칠리 등을 첨가하여 만든 멕시코 소스인 살사 란체라(Salsa Ranchera), 몰레(Mole), 살사 베르데(Salsa Verde) 등이 사용될 수 있다. 조리법 구운 포블라노(poblano) 고추는 얇은 끈 모양으로 잘라놓거나 정사각형 모양으로 작게 잘라 준비한다. 블랜더에 고추와 살사 베르데, 고수, 사워크림을 넣어 갈아 놓는다. 냄비에 기름을 넉넉하게 부어 끓이다 옥수수 토르티야를 첨가하여 빠르게 튀겨준다. 토르티야를 반으로 잘라 반원 모양으로 만들어준다. 앞에서 만들어놓았던 소스를 넓고 깊은 볼 안에 넣고, 잘라놓은 토르티야의 양면에 소스가 묻도록 담가준다. 베이킹 디시를

안티과 과테말라

안티과 과테말라

과테말라에 있는 사카테페케스주(州)의 주도(州都). 옛 안티과, 과거의 수도 과테말라의 수도 과테말라 시에서 북서쪽으로 25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작은 도시로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인근에 아구아, 아카테난고, 푸에고 등 세 개의 화산이 있어 지진과 홍수 피해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안티과 과테말라는 16세기 중반 에스파냐에 의해 건설되어 200여 년간 과테말라 왕국의 수도로 번영했다. 전성기는 17세기로 인구 7만에 중앙아메리카 예술 학문 중심지였다. 하지만 1773년 두 차례의 대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자 25km 떨어진 곳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과테말라 시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수도를 ‘옛 과테말라’라는 뜻의 안티과 과테말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간단히 줄여서 안티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300년 전 식민지 개척시대의 향기 인구 3만 명의 안티과는 쉬엄쉬엄 걸어도 하루가 안 되어 다 볼 수 있는 작은 규모지만 옛 왕국의 수도답게 곳곳에 유적이 있어 볼거리가 많다. 지진으로 무너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과거의 건축물 사이를 걷노라면 300년 전 식민지 개척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도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중앙 공원 근처에는 시청사로 쓰이는 과거 총독부 건물, 아직도 복원공사 중인 대성당, 아름

슬라이드 바로가기
병자호란

병자호란

1636년 12월∼1637년 1월까지 일어난 조선과 청나라의 싸움. 정치적 배경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금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내세우자 1627년 후금(後金)은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조선과 후금은 강화를 맺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친명정책을 취하는 조선을 견제하게 되었고 배후의 안정을 위해 조선을 굴복시킬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후금은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의 대등한 관계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로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자 홍타이지는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하였다. 전쟁의 전개

포토커뮤니티

지구촌 여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