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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

힌두교

인도에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브라만교(婆羅門敎)가 민간신앙과 융합하여 발전한 종교.
'인도교(印度敎)'라고도 한다. 힌두교를 범인도교라 함은 힌두(Hindū)는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 명칭 ‘신두(Sindhu:大河)’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도와 동일한 어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기원전 25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아리안족의 침입(기원전 2000∼기원전 1500?) 이후 형성된 브라만교를 포함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아리안 계통의 브라만교가 인도 토착의 민간신앙과 융합하고, 불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300년경부터 종파의 형태를 정비하여 현대 인도인의 신앙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교조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양한 신화·성전(聖典) 전설·의례·제도·관습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을 통일하여 하나의 종교로서의 구체적인 기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이다. 이것의 기원은 브라만교에 규정된 사성(四姓: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 제도이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변천하여 현대의 카스트 제도에는 종족·직업·종교적인 모든 조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인도인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인도인은 힌두교로 태어난다고 하며 카스트 제도에는 엄격하지만 신앙에는 상당히 관용적이다. 고대 브라만교와 차이점이 있다면, 브라만교가 《베다》에 근거하여 희생제를 중심으로 하며

땡스기빙 디너

땡스기빙 디너

북미지역에서 추수감사절에 먹는 저녁 식사로, 칠면조 구이, 스터핑, 크랜베리 소스, 매시트포테이토, 호박 파이 등으로 구성된다. 북미지역에서 추수감사절인 땡스기빙 데이(Thanksgiving Day)에 먹는 저녁 식사이다. 북미에서는 추수감사절이 되면 각지에 흩어져 사는 가족 혹은 친구들이 한데 모여 함께 저녁 식사를 즐기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요리는 칠면조 구이, 스터핑(stuffing), 크랜베리 소스, 매시트포테이토, 호박 파이 등으로 구성된다. 땡스기빙 디너는 저녁에 먹는 것이 보통이나 이른 오후나 점심에 먹기도 하며, 저녁식사의 주최자인 주인이 칠면조 구이를 부위별로 잘라내어 손님들의 접시에 한 조각씩 덜어주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역사 땡스기빙 디너의 유래는 영국 출신의 미국 플리머스 식민지의 건설자인 윌리엄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 총독이 1621년 11월 추수감사절에 자신들에게 사냥과 농사 등의 지식을 전수하여 주었던 북미 원주민 일족인 왕파노아그(Wampanoag)족을 초대하여 첫 추수를 축하하며 삼 일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축제를 열었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1789년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지정하였으나 그 영향이 미국 전역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이후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3년 10월 3일 추수감사절을

체스키 크룸로프 역사지구

체스키 크룸로프 역사지구

체코 남체코주에 있는 도시유적. 프라하에서 남서쪽으로 200여 km 떨어진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근처에 체스키크룸로프가 있다. S자로 완만하게 흐르는 블타바 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작은 도시로 붉은 지붕과 둥근 탑이 어우러져 동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체코가 공산 국가였던 시절에는 그저 낙후된 도시에 불과했던 체스키크룸로프는 1992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300여 개 이상의 건축물이 문화 유적으로 등록되었으니 도시 전체가 유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3세기 남 보헤미아의 비테크 가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고딕 양식의 성을 짓기 시작한 것이 체스키크룸로프의 시작이다. 이후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건물들이 일부 추가 되었으나 18세기 이후에 지어진 건물은 거의 없다. 중세 마을의 특징이 가장 잘 살아 있는 곳으로 평가 받고 있다. 13세기 세워진 체스키크룸로프 성은 프라하 성에 이어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성이다.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하면서 둥근 지붕의 탑과 회랑 등이 추가 되었다. 성 안에는 영주가 살던 궁전과 예배당, 조폐소, 바로크식 극장과 정원이 재현되어 있어 중세 귀족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다. 구시가의 중심지는 중세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스보르노스티 광장으로 주변에 후기 고딕 양식의 성비투스 성당 등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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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이이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의 저술을 남겼다. 현실ㆍ원리의 조화와 실공(實功)ㆍ실효(實效)를 강조하는 철학사상을 제시했으며, <동호문답>ㆍ<만언봉사>ㆍ<시무육조> 등을 통해 조선 사회의 제도 개혁을 주장했다. 우리나라의 18대 명현(名賢) 가운데 한 명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이다.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 26일에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의 셋째 아들로 외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13세의 나이로 합격했으며, 조광조의 문인인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4년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으나, 이듬해 하산하여 외가인 강릉으로 돌아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자경문은 입지(立志)·과언(寡言) 등 11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세운 것이다. 22세(1557년)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고, 이듬해 예안(禮安)에 낙향해 있던 이황(李滉)을 찾아가 성리학에 관한 논변을 나누었다. 1558년(명종 13) 별시(別試)에서 천문·기상의 순행과 이변 등에 대해 논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1564년(명종 19년)에 실시된 대과(大科)에서 문과(文科)의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삼장장원(三場壯元)으로 불렸다.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를 포함해 응시한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사람들에게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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