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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탈리아의 탐험가. 에스파냐 여왕 이사벨의 후원을 받아 인도를 찾아 항해를 떠나 쿠바, 아이티, 트리니다드 등을 발견했다. 그의 서인도 항로 발견으로 아메리카대륙은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에스파냐가 주축이 된 신대륙 식민지 경영도 시작되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이름은 영어식 표기이며 실제 그의 이름이 이렇게 불렸을 가능성은 없다. 이탈리아명은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이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생하였고 1477년에 리스본에 나타날 때까지의 행적은 명백하지 않지만 상당한 학식을 지녔으며, 일찍부터 항해에 종사하였다고 전해진다. 1479년 결혼하였는데, 그의 장인이 선장이었기 때문에 해도제작(海圖製作)에 종사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수학자 P.토스카넬리에게서 지도(地圖)를 구해 연구한 결과 서쪽으로 항해하여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1484년 포르투갈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탐험을 헌책(獻策)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1486년 콜럼버스는에스파냐로건너가 후원자를 찾았다.그는에스파냐 카스티야 왕조의 이사벨 여왕을 만나 그의 대담한 항해계획을 설명하였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왕실에서 거절하여 그의 항해계획이 또 실패하였다. 그는 영국, 포르투갈, 프랑스에 재차 후원을 요청하였다가 번번이 거절만 당하였다. 그의 집요한 노력으로 에스파냐의 후원을 받아내었다.에스파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진출에 관

나폴리 역사지구

나폴리 역사지구

이탈리아 캄파니아(Campania) 지방 나폴리에 있는 역사도시유적. 2,5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도시로서 다양한 역사 건축물이 보존되어 있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나폴리는 BC 470년 무렵 네아폴리스(새로운 도시)라는 이름으로 건설되었다. BC 4세기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로마시민의 피한지와 항해도시로 번영하였다. 553년에는 동로마제국의 관할하에 들어갔고 763년에는 나폴리공국으로 독립하여 여러 세기에 걸친 번영기를 맞이하였다.  1266년에는 프랑스 앙주가(家)의 수도가 되었고 1282년에는 나폴리왕국이 성립되었다. 15세기 중반에는 르네상스 문화의 번성으로 전성기를 누렸으며, 16세기 초에는 에스파냐의 중앙집권 정책 아래 행정과 사법의 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 초에는 시칠리아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1820년에는 나폴리혁명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1860년에는 이탈리아왕국이 성립하였다. 도시 곳곳에 다양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남아 있다. 고대의 유적으로는 시 근교에 있는 로마시대 카타콤베(지하묘지)의 프레스코화, 4세기에 건설한 산타레스티투타(Santa Restituta)성당, 동로마시대인 5세기의 산조반니 인 폰테 세례당의 모자이크 등이 있다.  중세의 건축물로는 나폴리에서 가장 오래된 델로보(dell'Ovo)성, 앙주가의 샤를 1세가 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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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

김시민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3800명의 병력으로 2만여의 왜적을 격퇴하고 전사하였다. 출생 1554년(명종 9)년 충청도 목천현(木川, 現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지평(持平)을 지낸 김충갑(金忠甲)이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운 무관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이다. 어려서부터 무사적 기질이 강하였고 활도 잘 쏘았다. 무과급제 무과에 대한 차별이 심하던 시절 가족의 반대에도 25세 때(1578)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判官)을 제수받았다. 1583년 여진 출신 니탕개(尼湯介)가 두만강을 넘어 쳐들어 오자 황해도 순찰사 정언신의 지휘하에서 신립, 이순신 등과 함께 공을 세웠고, 군기시(軍器侍) 판관으로 재임하다 병기 및 군사훈련에 관하여 토론하다 건의사항이 채택되지 않자 병조판서와 갈등을 빚고 사직하였다. 그 후 다시 훈련원 군기시(軍器侍) 판관으로 복관되었다. 당파와 이해관계를 갖지 않아 정치적으로도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진주성 수성 1591년(선조 24) 진주통판(晋州通判)으로 천거되었고 진주성을 지켰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1592) 방비태세를 갖추도록 조치했고 5월 진주목사 이경(李璥)이 달아나자 임시 진주목사로 임명되었다. 6~7월에는 사천, 고성, 진해에 주둔하는 왜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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