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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하는 행위를 총칭하지만, 고유명사로 쓸 때는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한다. 특히 1945년 1월 27일 폴란드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인종청소라는 명목 아래 나치스에 의해 학살되었는데, 인간의 폭력성, 잔인성, 배타성,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20세기 인류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보스니아 내전이나 르완다의 종족분쟁, 킬링필드로 불리는 캄보디아 내전 등 세계 곳곳에서 대량 학살이 자행됨으로써 홀로코스트 문제가 여전히 국제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20세기 최대의 대학살로 꼽히는 만큼 이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영화·소설·다큐멘터리 등도 많이 등장했다. 대표작으로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임레 케르테스의《운명》이나,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쥐》등이 있으며, 자전적 수기에는 유명한《안네의 일기》를 비롯,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엘리 위젤의 《밤》등이 있다. 영화 작품 중에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등이 있

쇤브룬 궁전과 정원

쇤브룬 궁전과 정원

함부르크 제국의 황제가 거주하던 성이며 건축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와 니콜라우스 파카시가 설계하였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남서쪽 교외에 있는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궁으로, 합스부르크 왕조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곳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비롯한 많은 왕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고,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했을 때는 나폴레옹군의 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 때 유럽을 호령했던 왕가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만, ‘아름다운 샘(Schonner Brunnen)’에서 유래한 쇤부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빼어난 모습을 보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건축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가 황제의 수렵용 소궁전이 있던 자리에 1696부터 1700년 사이에 쇤부른 궁전을 처음 지었다. 이어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때인 1744년부터 1749년 사이에 니콜라우스 파카시(Nicolaus Pacassi)의 설계에 따라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다. 개축 규모가 워낙 커서 애초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알력관계에 있던 이웃나라 프랑스에 국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다분히 있었던 터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견줄 만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이 탄생하게 된다. 궁전은 부드러운 황색의 외벽이 인상적인 거대한 3층 건물로 방이 1441개나 된다. 바로크 양식의 건물에 화려한 로코코 양식의 실내장식을 해 전체적으로 화려하면서도 따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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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손병희

한말 천도교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천도교 제3세 교주를 지냈다.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으며 교육·문화사업에 힘썼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호 의암(義菴). 초명 응구(應九). 후명 규동(奎東). 충북 청주 출생.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3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鍊性修道)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元山)·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權東鎭)·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합하여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을사늑약에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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