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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서남아시아의 고대문명, 또는 티그리스강(江)과 유프라테스강(江) 사이 메소포타미아 남동쪽의 지명. 바빌론 제1왕조를 가리키기도 한다. BC 4000년대 말 이곳 남부에 세운 수메르인(人)의 도시국가에서, 바빌로니아 문명의 기초가 된 수준 높은 도시문명이 피어났다. BC 2350년 무렵 셈계(系) 아카드인(人)의 사르곤 1세가 통일국가를 건설하여, 181년 동안의 아카드 시대에 수메르의 문화는 셈족화되어 오리엔트의 각 지방에 전파되었다. 그 뒤 한동안 혼란이 계속되다가, BC 2050년 무렵 수메르인의 우르나무가 우르 제3왕조를 창시하고, 이 왕조는 5대 107년 만에 엘람인(人)에게 멸망된다. [일러스트]이집트문명과 메소포타미아문명(일러스트) (항목 편집 시, 수정·삭제 금지) BC 1830년경 이신·라르사와, 아모리인(人)의 수무아붐(재위 BC 1831~BC 1817)이 개창한 바빌론 제1왕조가 패권을 다투었다. 바빌론 제1왕조의 6대왕 함무라비는 숙적인 이신·라르사를 토벌하고 가까운 이웃을 평정, 엘람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또한 중앙집권제도를 확립하고, 수도 바빌론에 성벽을 쌓고 각지의 신전을 재흥하여 마르두크신(神)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재편성, 신상(神像)을 안치하였다. 운하를 파고 도로도 정비하여 무역을 융성하게 하였으므로 국력이 충실해져서,

나베트

나베트

밀가루, 달걀, 오렌지꽃물, 버터 등으로 만든 보트 모양의 과자로,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프로방스 지방의 전통적인 디저트 요리이다. 밀가루, 달걀, 오렌지꽃물, 버터 등으로 만든 보트 모양의 과자로, 이때 나베트라는 명칭은 ‘보트’를 의미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하였다.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 지방의 전통적인 디저트 요리로,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région) 부슈뒤론 데파르트망(département)의 수도인 마르세유의 명물로도 알려져 있다. 마르세유에서는 예수의 봉헌축일(Candlemas; 기독교에서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일로 아기 예수가 성탄한지 40일이 되는 2월 2일을 가리킨다)에 나베트를 먹곤 하였다. 이때의 나베트는 전통적으로 12개씩 구입되곤 하는데, 이는 각각의 나베트가 1년 중 한 달을 상징하며 그 한 달간 가정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징 나베트는 보트의 모양을 본 떠 만들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길쭉한 타원형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길이는 약 7~8cm 정도이다. 과자는 양 끝으로 갈수록 폭이 좁은 형태를 띠고, 이러한 양 끝을 잇는 선이 중앙을 가로질러 길게 그어져 있다. 전통적으로 오렌지꽃물을 첨가하여 만드는 과자로, 바삭바삭하고 바스러지기 쉬우며 너무 달지 않은 단맛을 가지고 있다. 이스트가 들어가지 않은 빵이며, 한 번 만들어 놓으면

모데나의 대성당, 토레 치비카, 피아차 그란데

모데나의 대성당, 토레 치비카, 피아차 그란데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 주(州)에 위치한 도시 모데나(Modena)에 있는 대성당과 종탑, 광장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탈리아 북부의 에밀리아로마냐 주(州)에 있는 도시로 중세의 종교·건축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 도시의 중앙 광장인 피아차 그란데(Piazza Grande)에는 모데나 대성당과 그에 딸린 종탑인 토레 치비카(Torre Civica)가 자리잡고 있다. 모데나 대성당을 중심으로한 도시의 주요 유적이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모데나 대성당은 유럽에서 가장 빼어난 로마네스크 양식 종교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가미되어 있다. 본래 이곳에 있었던 두 교회가 파괴된 이후 11-12세기 이탈리아 북부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여성이었던 토스카나의 마틸다 백작 부인의 후원을 받아 1099년에 건설을 시작하였다. 유명 건축가였던 란프란코(Lanfranco)와 빌리겔무스(Wiligelmus)가 건축에 참여 하였으며 1184년에 봉헌식이 거행 되었고 1322년에 완공되었다. 대성당의 외벽은 흰색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나 건축 당시 로마 시대에 이 자리에 있다가 파괴된 교회의 잔해를 섞어 사용 하였기 때문에 종종 붉은 색이나 회색 돌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교회의 내 외부 벽면에는 다양한 성경 구절을 표현한 부조 작품들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으며 1719년과 1934년에 제작된 파이프 오르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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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

고경명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인·의병장. 임진왜란 때 금산싸움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문집《제봉집》 등이 있다. 1533년 전라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대사간을 지낸 고맹영(高孟英)이고 조부는 형조좌랑을 역임한 고운(高雲)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자 이순(而順), 호 제봉(霽峰) ·태헌(苔軒), 시호 충렬(忠烈)이다. 1552년(명종 7) 진사가 되었으며, 1552년(명종 8)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공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전적(典籍) ·정언(正言)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3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할 때 교리(校理)로서 이에 참여하였다가 그 경위를 이량에게 알려준 사실이 발각되어,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면되었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西人)이 제거될 때 파직되어 낙향하였다. 이듬해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성을 점령하였고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이 이끄는 관군 5만 명이 겨우 수천의 왜군에게 어이없게 패배하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潭陽)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고경명은 6월 1일에 담양을 출발하여 북상하였다. 6월 13일에 전주에 도착해 큰아들 고종후(高從厚)에게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군을 막도록 하고, 22일에는 여산(礪山)으로 옮겼다.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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