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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마크아

땀마크아

구워 으깬 가지에 마늘, 고추 등의 각종 향신료와 채소 등을 첨가하여 버무린 타이 북부 지역의 특선 요리이다. 구워 으깬 가지에 각종 향신료와 채소 등을 첨가하여 버무린 무침 요리이다. 타이 북부지역의 특선 요리이며, 이때 타이어로 ‘땀(ตำ, tam)’은 ‘찧다’를 의미하고, ‘마크아(มะเขือ, makhua)’는 가지를 뜻한다. 요리의 주재료인 가지는 타이산의 길쭉한 초록색 가지(Thai Long Green Eggplant)가 사용되는데 길이는 약 25~30cm 정도에 맛은 순하고 달콤하며, 무척 부드러운 식감을 갖는다. 완성된 땀마크아는 삶은 달걀과 함께 바나나잎에 싸서 포장되는데, 전통적으로 찹쌀밥과 함께 먹는다. 조리법 타이산의 길쭉한 초록색 가지를 준비하여 녹색 고추, 샬롯과 함께 양면을 구워준다. 절구에 씨를 뺀 녹색 고추와 샬롯, 마늘을 넣어 으깨준 뒤, 여기에 토막낸 가지를 넣어 한데 으깨어 준다. 소금으로 간을 하고 잘 섞어준 뒤 내용물을 약 두 시간 정도 냉장 보관한다. 여기에 타이의 피시 소스인 남쁠라(น้ำปลา, nam pla), 민트, 실란트로를 넣어 잘 섞어준다. 여기에 반숙으로 삶은 달걀을 넣고 숟가락으로 으깨어 섞어준다. 완성된 요리는 접시에 담고 가니쉬로 다진 쪽파를 올린다. 땀마크아는 삶은 달걀, 찹쌀밥과 함께 먹을 수 있다.

케르소네소스 타우리카 고대 도시와 코라

케르소네소스 타우리카 고대 도시와 코라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남서쪽에 있는 고대도시 케르소네스스와 초라(포도원으로 사용된 농경지) 유적으로,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케르소네소스(Chersonese, Chersonesos, Chersonesus, Cherson)는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타우리카(Taurica) 또는 타우릭 케르소네소스(Tauric Chersonese)라고 불렸던 크림반도(Krym Pen.,;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로 돌출해 있는 반도)의 남서쪽에 있었던 고대도시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우크라이나 크림주(州) 세바스토폴(Sevastopol)의 외곽지역에 해당한다. 고대 그리스 식민도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어서 ‘우크라이나의 폼페이’ 또는 ‘러시안 트로이’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다. 기원전 5세기에 고대 그리스의 도리스인(Dorians)들이 흑해 북부의 해안 지역인 이곳에 식민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케르소네소스란 말은 그리스어로 ‘반도’라는 뜻이지만 이후 이 고대도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4세기부터 번영하기 시작한 케르소네소스는 그리스 북동부 지역과 타우리카(크림반도), 스키타이족(Scythian)이 살던 러시아 남부로 진입하는 관문으로서 해상무역의 요지였고, 2천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흑해의 무역 루트를 연결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다. 이곳에 남아 있는 도시(폴리스 polis) 유적과 도시 외곽에 있었던 초라(chora; 직사각형의 농경지) 유적은 기원전 4세기~기원전 3세기에 식민지 개척자들이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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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훈민정음

조선 세종(世宗)이 1446년(세종 28) 9월에 제정·공포한 한국의 문자. '정음(正音)'이라고도 하며, 속칭 '언문(諺文)'이라고도 하였다. 글자로서훈민정음이 완성된 것은 1443년(세종 25)이며,나라의 글을창제한 목적을 실천하기 위하여 금중(禁中)에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의 해례(解例)와 같은 원리를 연구하게 하고, 그 보급책의 일환으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고 운서(韻書)를 번역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공포하였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의 뜻이며(訓民正音諺解), '정음'은 '우리나라 말을 정(正)히, 반드시 옳게 쓰는 글'임을 뜻한다(釋譜詳節序).훈민정음 제정에 관해서는 정인지(鄭麟趾)를 비롯하여 당시 집현전(集賢殿) 학사인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의 협조로 이루어졌다는 설도 있지만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전까지 언급이 없다. 만약 여러 신하들과 협업하여 만든 것이라면 실록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세종이 혼자서 만든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고 설득력이 있다. 당시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한글을 창제한다는 것은 사대(事大)주의에 젖어 있는 조선의 조정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고, 세종의 훈민정음을 반대했던 최만리의 상소문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1940년 9월에는 훈민정음 원본이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어 국보70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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