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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마하트마 간디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이자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차별에 대한 투쟁으로 유명해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에 대해 반영·비협력 운동 등의 비폭력 저항을 전개하였다. 출생과 집안 1869년 10월 2일 인도 서부포르반다르(또는 수다마푸리 Sudamapuri)에서 태어났다. 간디의 집안은 상인계급(Bania Caste)에 속했고 식료품상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우탐찬드 간디(Uttamchand Gandhi)는 포르반다르에서 관리로 근무했다. 그는 아들 6명을 두었는데 그중 5번째 아들 카바 간디(Kaba Gandhi)가 마하트마 간디의 아버지이다. 카바 간디는 부인이 매번 사망하여 네번이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 아내였던 푸틀리바이(Putlibai) 사이에서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가 마하트마 간디였다. 카바 간디가 라지코트의 관리로 봉직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이주하여 초급학교를 다녔다. 조혼 풍습에 따라 13세에 동갑인 카스투르바이(Kasturbai)와 결혼했다. 당시 결혼은 형, 삼촌과 동시에 치뤄진 합동결혼식 이었다. 16세에 아이를 낳았으나 4일만에 죽었고 그해 아버지도 치루염으로 사망하였다. 훗날 마하트마 간디는 그의 자서전에서 어린시절 결혼생활에 죄책감을 느꼈고 인도의 조혼풍습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영국 유학 1887년 18세 때 아메다바드(Ahmedabad)에서 치뤄진 대학 자격시험에 합격하였다. 학비가 싼 사말다스(Samaldas)대학에 입학하였지만수업 내용이 어려워 첫 학기만 다니고 그만두었다.하지만 영국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돌아오면 좋은 일자리와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들로 바르셀로나 등지에 있다. 1984년 구엘공원·구엘저택·카사밀라가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뒤 2005년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작품 등이 추가되어 확장지정되었다. 스페인의 카탈루냐 자치지방에 속한 바르셀로나를 비롯하여 칸타브리아 자치지방, 카스티야이레온 자치지방, 발레아레스제도 등지에 산재한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의 건축 작품들을 가리킨다. 가우디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직선보다는 곡선을 강조한 아르누보(art nouveau) 스타일의 건축물들로 새로운 공간 미학을 선보여 이후의 건축과 시공 기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건축양식뿐 아니라 정원과 조각 등 장식미술 분야에서도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한 선구자로 꼽힌다. 1984년 바르셀로나에 있는 구엘공원(Park Güell)과 구엘저택(Palacio Güell), 카사밀라(Casa Mila)의 세 작품이 '바르셀로나의 구엘공원, 구엘저택, 카사 밀라'라는 명칭으로 먼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후 2005년에 가우디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당의 예수 탄생 파사드(Nativity façade)와 지하 예배실을 비롯하여 카사 비센스(Casa Vicens), 카사 바트요(Casa Batlló), 콜로니아 구엘(Colonia Güell)  성당의 지하 예배실, 카사 칼베트(Casa Calvet), 피구에라스(Figueras) 별장, 테레시아나스(Teresianas) 대학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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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

조병옥

일제 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 운동가 겸 정치가. 한인회 · 흥사단 등의 단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신간회 창립위원 · 재정총무를 역임하기도 했으며 광복을 맞이해 한국 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청의 경무부장에 취임, 치안 유지와 공산당 색출에 진력하기도 했다. 본관 한양(漢陽). 호 유석(維石). 충청남도 천안(天安)에서 출생하였다. 공주영명학교(公州永明學校)를 거쳐 1911년 평양숭실학교(平壤崇實學校)를 졸업, 1914년 연희전문(延禧專門)을 졸업하고 곧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주(州) 킹스턴의 와이오밍고교에 입학, 1918년 졸업하였다. 이어 컬럼비아대학교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하는 한편, 한인회(韓人會)·흥사단(興士團) 등의 단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 같은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그 해 귀국하여 연희전문 전임강사로 있으면서 YMCA 이사와 비밀독립단체 그리스도신우회 회원이 되고, 1927년 신간회(新幹會) 창립위원·재정총무를 역임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자로 검거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1932년 조선일보사 전무 겸 영업국장에 취임하였으며, 1937년 수양동지회(修養同志會)사건으로 2년간 투옥되었다.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여 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 등과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청의 경무부장에 취임, 치안유지와 공산당 색출에 진력하였다. 1948년 대통령특사·유엔 한국대표 등을 역임하고, 1950년 6·25전쟁 때 내무장관으로 대구 사수의 진두지휘를 담당하였다. 그 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의 의견충돌로 사직하고, 반독재(反獨裁)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1954년 제3대 민의원(民議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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