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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저우 졸정원

쑤저우 졸정원

중국 장쑤성[江蘇省] 쑤저우시[蘇州市]의 고성(古城) 동남쪽에 있는 정원. 명나라 정덕제(正德帝, 1505~1521)의 재위기간에 어사(御史) 벼슬을 지낸 왕헌신(王獻臣)이 낙향해 다훙사[大弘寺]라는 절이 있던 곳에 조성했다고 전해지며, 전체 면적은 5만 1950㎡에 이른다. ‘졸정(拙政)’이라는 명칭은 진(晉)나라 때의 시인인 반악(潘岳)의 〈한거부(閑居賦)〉에서 비롯되었다. 반악은 “정원에 물을 주고 채소를 키워 밤낮의 음식을 제공하는 것도 세태에 따르지 않고 우직함을 지키는 수졸(守拙)하는 자의 위정(爲政)”이라고 노래했는데, 이 구절에서 ‘졸정’이라는 명칭을 가져왔다고 한다. 졸정원은 명나라 때의 학자이자 화가인 문징명(文徵明)의 글과 그림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베이징의 이허위안[頤和園, 이화원], 청더[承德]의 퍼서산장[避暑山莊, 피서산장], 쑤저우[蘇州]의 유위안[留園, 유원]과 더불어 ‘중국의 4대 정원’으로 꼽히며 관광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졸정원은 1961년 중국 정부에 의해 중점문물보호지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쑤저우원림[蘇州園林]에 포함되어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온 개인정원으로서, 고대 강남지방 관료들이 거주하던 주택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다. 정원은 동부·중부·서부의 3부분으로 나뉘며, 호수가 전체 면적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동부는 지세가 시원하게 트여 있고, 평평한 언덕 위에 부용사(芙蓉榭)·천천정(天

쿠엥카 성곽도시

쿠엥카 성곽도시

스페인 카스티야라만차(Castile-La Mancha) 자치주 쿠엥카 지방에 있는 역사도시 유적. 독특한 지형을 이용하여 건설한 중세 요새도시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1996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베리아반도의 메세타 남동부 해발 900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9세기 무렵 이곳을 점령한 이슬람교도들이 후카르(Júcar)강과 우에카르(Huécar)강 사이의 언덕 위에 세운 요새였으나 뒤에 도시로 발달하여 후(後)우마이야왕조의 거점이 되었다. 이후 1177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Alfonso XIII)가 다시 점령하였고 1189년에는 주교좌가 설치되어 카스티야의 종교·행정·경제의 중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도시의 전성기인 16세기에는 인구가 1만 6,000명에 이르렀으며 도시의 영역도 더욱 넓어졌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요새에는 수도원과 성당이 들어섰고 요새 안에 거주하던 상류계층은 낮은 도시 중심부로 이주하였다. 17세기에 들어서자 경제의 기초를 이루던 직물업의 쇠퇴로 인구가 4,000여 명으로 줄어들었으나, 도시의 종교적인 역할은 더욱 커졌다. 17세기 후반부터 도시를 재건, 복구하였으며 1940년대 이후에는 본격적인 복원작업을 시행하였다. 요새도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옛시가지에는 성당과 수도원 등의 종교건축물과 귀족들의 저택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13세기 중반에 고딕 양식으로 건립된 쿠엥카대성당, 산미겔성당(Church San Miguel), 18세기에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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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석비로 5세기 무렵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와의 관계를 알려주는 역사적 유물. 1981년 3월 18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공식 명칭은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이지만, 일반적으로 신라 시대 충주의 옛 지명에서 비롯된 ‘중원고구려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의 석비(石碑)로 1979년 단국대학교박물관 조사단이 발견하였다. 1981년 3월 18일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원본은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에 위치한 충주고구려비 전시관에 보존되어 있다. 높이 203cm, 폭 55cm, 두께 33cm이며, 커다란 자연석을 다듬어 그대로 비면(碑面)으로 삼고 있다. 4면에 모두 예서체로 글을 새겼지만 뒷면과 우측면은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마모되었고, 앞면과 좌측면 일부의 내용만 확인된다. 글자 하나의 지름은 3∼5cm로 앞면에 23자씩 10줄, 좌측면에 23자씩 7줄이 있으며, 우측면에는 6줄, 뒷면에 9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가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까지 영역을 확장한 5세기 장수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에서는 고구려 왕을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 등의 표현에서 고구려군이 신라의 영토에 주둔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외에 고모루성(古牟婁城), 대사자(大使者) 등 당시의 지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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