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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

에도 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이이 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어 막부(幕府)를 개설한 1603년부터 15대 쇼군[將軍] 요시노부[慶喜]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1867년까지의 봉건시대. 정권의 본거지가 에도[江戶:현 도쿄]였으므로 이렇게 부르며, 또한 정권의 주인공인 도쿠가와의 성을 따서 도쿠가와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대는 가마쿠라[鎌倉]시대에 이룩되기 시작한 봉건사회체제가 마지막 마무리를 거쳐 확립된 시기이며, 무사계급의 최고지위에 있는 쇼군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전국을 통일지배하는 집권정치 체제가 확립된 시기이다. 병농분리(兵農分離)가 완성되고 다이묘[大名]를 비롯한 무사계급의 봉토(封土)와 관록제, 농민으로부터 연공(年貢)을 징수하는 사회적 원리 등이 확립되었다. 상인(商人)과 상업에 대한 통제는 대외적으로 유례없는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나타나 20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시대는 또 엄격한 신분제도의 사회였으며, 사농공상(士農工商) 중 인구 5∼6 %의 무사계급이 80% 이상의 농민과 5∼6 %의 공상(工商)을 지배하였다. 무사계급도 쇼군을 최고주권자로 하여 여러 계층으로 구별되고, 동시에 철저한 주종(主從) 관계가 성립되었다. 260∼270가(家)에 이르는 다이묘는 영토가 주어지는 동시에 엄격한 통제하에 들어갔고, 개역(改易)·전봉(轉封) 등의 처분을 자주 받았다. 지배계급이라 해도 하급무사는 정해진 녹봉을 받는 도시의 소비자에 불과하였다. 농민에도 몇 개의 계층이 있었으며 상업의 활동은 전국적인 상품유통망을 조성하는 동시에 농작물 유통과 결부하여 농촌을 화폐경제로

무마나우

무마나우

마리네이드한 돼지고기를 데쳐서 라임주스, 남쁠라, 마늘 등을 첨가하여 만든 새콤한 드레싱을 곁들여낸 음식으로, 타이의 요리이다. 마리네이드 하여 데친 돼지고기에 라임주스 등을 첨가한 새콤한 맛의 드레싱을 곁들여낸 음식이다. 타이의 요리이며, 이때 타이어로 ‘무(หมู)’는 돼지를, ‘마나우(ูมะนาว)’는 라임을 뜻한다. 무마나우는 부드럽고 촉촉한 식감을 가지며, 매콤 새콤하면서 달콤하고 짠맛이 난다. 요리는 중국음식에서 즐겨 쓰이며 브로콜리와 맛이 유사한 야채인 가이란[芥蘭], 앵배추, 오이, 당근, 콜라비, 셀러리 등과 같은 야채를 곁들여 먹을 수 있다. 조리법 돼지고기는 엉덩이살이나 허릿살을 준비하여, 얇게 슬라이스한다. 볼에 소이 소스, 물, 오일을 넣고 섞은 뒤 돼지고기를 넣어 버무려준다. 여기에 옥수수전분을 넣어 잘 버무린 뒤 최소 20분간 재워둔다. 절구에 마늘, 칠리 고추를 넣고 빻다가 팜 슈거를 넣고 빻는다. 여기에 남쁠라, 라임 주스를 넣어 잘 섞고, 잘게 다진 실란트로를 넣어 드레싱을 완성한다. 냄비에 물을 넣고 끓이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양념하여 놓았던 돼지고기를 넣어 데쳐준다. 돼지고기를 건져 따듯한 물에 한 번 넣었다 건져준다. 접시에 잘게 썬 양배추를 깔고 그 위에 돼지고기를 올린다. 앞서 만들어 놓은 드레싱을 뿌리고, 그 위

세고비아 옛 시가지와 수도교

세고비아 옛 시가지와 수도교

스페인 카스티야레온지방(Castile-Leon) 세고비아주에 있는 역사유적. 로마시대의 수도교와 로마네스크양식의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198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세고비아는 에레스마강(Eresma R.)과 클라모레스강(Clamores R.) 사이에 있는 해발 1,000m의 바위산에 건설되었다. 11세기 후반에 이슬람교도들이 들어와 도시를 파괴하였으나, 알폰소 10세가 도읍지로 정하며 번성하였다. 16세기 초에는 카를로스 1세와 자치도시 주민(코무네로스)들의 싸움으로 도시 대부분이 폐허로 변하였으나 곧 재건되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오늘날 도시 곳곳에는 로마시대의 수도교와 성채,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 등의 수많은 기념비적 건축물이 보존되어 있다. ‘다리’로 불리는 수도교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98~117년에 건설한 것으로 프리오강(Rio Frio)에서 물을 끌어와 높은 지대 주택가에 공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수도교는 다듬은 화강암으로 만든 166개의 2층 아치로 되어 있으며 전체길이 약 813m, 최고 높이 약 30m에 이른다. 아치 윗단 가운데에 있는 벽감에는 성세바스티아누스상이 안치되어 있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의 하나인 알카사르(Alcázar)는 군사요새로 사용된 아름다운 성이다. 궁전과 높이 80m에 이르는 망루가 있으며 건축연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중세에는 카스티야왕들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는데, 왕들마다 원래의 요새에 새로운 건축물을 지어 확장하였다. 13세기 중반에 일부분이 붕괴되고 19세기에는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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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

조헌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 등 승병과 합세해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본관 백천(白川). 자 여식(汝式). 호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 문열(文烈).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생.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정주교수(定州敎授)가 되고, 1572년(선조 5) 정자(正字)로 왕이 절에 향(香)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여 삭직된 뒤 곧 저작(著作)에 기용되고, 1574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호조와 예조의 좌랑·감찰을 거쳐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남형(濫刑)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평(富平)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좌랑에 등용되어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종묘서령(宗廟署令)을 거쳐 1582년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나갔다. 1586년 공주제독관이 되어 동인이 이이·성혼을 추죄(追罪)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고향에 내려가 임지를 이탈한 죄로 파직당하였다. 1589년 동인을 공박하다가 길주에 귀양가고, 그해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나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이이의 문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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