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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불교

티베트불교

티베트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한 불교. 라마교라고도 한다. 손챈감포[松贊岡保] 왕(?~649) 때 중국 문성공주와 브리쿠티 데비 두 왕비가 중국계와 인도계의 불교를 도입하였다. 이들 불교는 주술을 중시하는 티베트의 고유신앙인 본교(bon敎)를 배척하지 않고 혼합된 형태를 지니고 토착화해 갔다. 그후 8세기 중엽, 인도의 샨티 락시타[寂護]와 파드마 삼바바[蓮華座]가 밀교(密敎)를 전한 뒤부터 티베트 불교의 근본은 밀교가 되었다. 랑다르마왕이 한때 파불(破佛)했었으나 1038년경 인도에서 초빙된 아티샤가 티베트 밀교를 크게 개혁하였다. 13세기에는 원(元)나라에 전파되어 국교가 되기도 하였다. 15세기에 총카파[宗喀巴]가 반야중관(般若中觀)사상을 기초로 하여 이를 밀교와 융화시킴으로써 티베트불교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의 종파를 황모파(黃帽派:게룩파)라 하며, 그 전의 종파를 홍모파(紅帽派:닝마파)라고 한다. 총카파의 제자 중 겐둔그룹(1391∼1475)이 초대 달라이라마[達賴喇嘛], 즉 법왕(法王)이 되어 현재 14대에 이르고 있다. 달라이는 몽골어로 바다를 뜻하며, 라마는 덕이 높은 스승을 가리킨다. 티베트인은 자신의 국가를 관음(觀音)의 정토(淨土)라 생각하며, 그 통치자인 달라이라마를 관음(觀音)의 화신으로 생각한다. 티베트불교는 티베트뿐만 아니라, 북인도·몽골 및 중국의 일부 지방에 있다.

허짜이몐셴

허짜이몐셴

전분을 묻혀 데친 굴과 육수 등을 첨가하여 만든 걸쭉한 질감의 국수 요리로, 타이완의 전형적이고 인기 있는 요리이다. 굴을 첨가하여 만든 국수 요리이다. 타이완의 전형적인 요리로, 노점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이다. 영어로는 ‘오이스터 베르미첼리(Oyster vermicelli)’라고 한다. 이때 ‘몐셴(麵線)’은 중국 푸젠성이나 타이완 요리에서 즐겨 쓰이는 밀국수를 말한다. 타이완에서는 보통 갈색 몐셴을 사용하여 허짜이몐셴을 만든다. 국물은 전분을 첨가하여 걸쭉한 질감을 띤다. 가니쉬로 실란트로를 곁들일 수 있으며 마늘 페이스트나 향신료, 중국식 흑식초를 곁들일 수도 있다.  조리법 냄비에 물을 붓고 끓이다 가다랑어포를 넣는다. 육수가 우러나면 체에 한번 걸러낸 뒤 다크 소이소스, 굴소스, 설탕, 백후추, 소금을 첨가하여 간을 맞춘다. 굴을 깨끗이 씻은 뒤 말린다. 굴에 고구마 전분을 바른 뒤 끓는 물에 넣고 전분이 반투명해질 때까지 살짝 데친다. 이후 굴을 건져서 찬물에 헹군 뒤 참기름을 넣어 버무린다. 옥수수 전분과 물을 섞어 전분물을 만들고 육수에 몐셴을 넣어 익힌다. 여기에 옥수수 전분물을 첨가하여 육수가 걸쭉해지면 면과 육수를 그릇에 담고, 그 위에 데친 굴, 다진 파, 튀긴 샬롯, 실란트로를 올린다. 완성된 허짜이몐셴은 흑식초를 곁들여

야로슬라블 역사지구

야로슬라블 역사지구

러시아의 서북부 도시 야로슬라블에 위치한 세계유산이다. 야로슬라블이 크게 번영하였던 시기인 17,18세기에 세워진 교회, 수도원, 극장, 시청 건물 등의 다양한 건축물들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2005년 유네스코에 의해 그 문화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러시아의 서부 야로슬라블주(Yaroslavl Oblast)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이 자리한 야로슬라블 주의 주도 야로슬라블(Yaroslavl)은 수도 모스크바(Moscow)에서 북동쪽으로 약 250km 떨어진 곳으로 볼가 강(Volga)과 코토로슬 강(Kotorosl River)이 합류되는 지점이다. 야로슬라블은 11세기 초 로스토프(Rostov) 공국의 변경 식민지로 처음 세워진 후 점차 그 지리적 이점을 살려 주요 상업지구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이곳은 도로와 철로 그리고 수로가 교차되는 중요한 교통 지점이다. 13세기 로스토프 공국으로부터 독립해 자치권을 획득했으며 17세기에는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18세기 야로슬라블은 카트린느 2세(Catherine II, Catherine the Great, 1729~1796, 재위 1762-1796)의 대규모의 도시 계획에 따라 신고전주의(Neo-classical)의 영향을 받은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 지역이 번영을 누리던 17세기에는 수많은 수도원과 교회들이 세워졌다. 건물들은 야로슬라블 형식(Yaroslavl type)으로 칭해지는 건축 방식으로 지어졌는데 붉은 벽돌로 건물을 지은 후 외부를 밝은 색 타일로 장식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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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석굴암 석굴

경주 석굴암 석굴

통일신라시대에 경주 토함산(吐含山)에 세워진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국가유산청에 등록된 정식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래 이름은 석불사이다.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예속되었고, 191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석불사 대신 현재의 석굴암(石窟庵)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刱)할 때, 왕명에 따라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지만,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신라의 기명(記名)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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