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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하리

니하리

고기와 골수를 각종 향신료와 밀가루를 첨가하여 뭉근하게 끓여낸 매콤한 맛의 스튜로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에서 즐겨 먹는다. 고기와 골수를 재료로 하여 만든 스튜이다. 인도 아대륙의 요리로 인도 전역과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에서도 있기 있는 음식이다. 인도에서는 올드델리, 파키스탄에서는 신드주의 주도인 카라치, 방글라데시에서는 다카와 치타공에서 특히 인기 있다. 가정에서는 물론 이드알피트르(Eid ul-Fitr)와 같은 특별한 행사에서 즐겨 먹으며, 가정에서 감기와 해열에 도움을 주는 음식으로도 알려져 있다.  17~18세기 무굴제국 시대에 유래한 음식으로 ‘니하리(벵골어로 ‘নিহারী’,  힌디어로‘निहारी’, 우르드어로 ‘نہاری’)‘라는 명칭은 아침을 의미하는 아랍어 ‘나하르(نهار‎)’에서 기원하였으며, 나와브(Nawab)들이 아침 기도 후에 아침 식사로 즐겨 먹었던 음식이다. 또한 니하리는 전통적으로 무굴 제국의 요새와 궁전 건설에 참여한 노동자 계급을 위해 무료로 제공되었던 아침 식사이기도 하였다. 요리는 하룻밤 사이에 조리하여 최소 5~6시간가량 뭉근하게 끓여내야 했는데, 인도 올드델리의 일부 식당에서는 이때 남은 니하리를 새로 만드는 니하리에 재사용하였고, 이러한 관행은 ‘타르(taar)’라 불리며 갓 조리한 나하리에 독특하고 풍부한 맛을 만들었다. 나하리는 오늘날에도 인도의 올드델리에서 특히 인기 있는 아침 식사메뉴이며, 올드델리에는 한 세기 이상 거들러

안티과 과테말라

안티과 과테말라

과테말라에 있는 사카테페케스주(州)의 주도(州都). 옛 안티과, 과거의 수도 과테말라의 수도 과테말라 시에서 북서쪽으로 25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작은 도시로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인근에 아구아, 아카테난고, 푸에고 등 세 개의 화산이 있어 지진과 홍수 피해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안티과 과테말라는 16세기 중반 에스파냐에 의해 건설되어 200여 년간 과테말라 왕국의 수도로 번영했다. 전성기는 17세기로 인구 7만에 중앙아메리카 예술 학문 중심지였다. 하지만 1773년 두 차례의 대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자 25km 떨어진 곳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과테말라 시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수도를 ‘옛 과테말라’라는 뜻의 안티과 과테말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간단히 줄여서 안티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300년 전 식민지 개척시대의 향기 인구 3만 명의 안티과는 쉬엄쉬엄 걸어도 하루가 안 되어 다 볼 수 있는 작은 규모지만 옛 왕국의 수도답게 곳곳에 유적이 있어 볼거리가 많다. 지진으로 무너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과거의 건축물 사이를 걷노라면 300년 전 식민지 개척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도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중앙 공원 근처에는 시청사로 쓰이는 과거 총독부 건물, 아직도 복원공사 중인 대성당, 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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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

유정

조선 중기의 승려.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하여 휴정의 휘하에서 왜군과 싸웠다.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의령에서 왜군을 격파했고, 정유재란 때 울산의 도산과 순천 예교에서 전공을 세웠다. 1604년 일본으로 건너가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속성은 임(任), 속명은 응규(應奎)이며,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泗溟堂 또는 四溟堂)·송운(松雲)·종봉(鍾峯),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형조판서에 추증된 임수성(任守城)의 아들로서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명종 16)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휴정(休靜;서산대사)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上東菴)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석방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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