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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트루먼

해리 트루먼

미국의 정치인으로 제33대 미국 대통령을 역임했다(재임 1945~53).
1884년 5월 4일 미주리주(州) 라마(Lamar, Missouri)에서 출생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 후 1906부터 12년간 가족과 함께 농장에서 일하였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포병소위로 참전하여 1919년 소령으로 전역하였고, 그 해 엘리자베스 월러스(Elizabeth Wallace)와 결혼하였다. 1923년 캔자스시티 법대(Kansas City Law School) 야간학부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그 후, 민주당의 도움으로 잭슨 카운티 법원의 행정담당 판사로 선출 되었고, 1927년에는 수석판사(행정관)에 선임되어 1934년까지 재임했다. 1934년 미주리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0년에는 ‘전쟁조사위원회(The war investigating committee)’ 의장을 맡았다. 1944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1945년 취임 3개월 만에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취임 직후,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으나, 연합군에 항복을 거부하는 일본에 대하여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하였다. 결국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다. 그 후, 소련이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의 합의 사항을 위반하며 튀르키예와 그리스를 위협하는 등 세계

이깐 바까르

이깐 바까르

마리네이드한 생선을 바나나 잎에 싸서 그릴에 구워낸 음식으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요리이다. 마리네이드 한 생선을 그릴에 구워 먹는 요리이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즐겨먹는 요리로, 노점에서도 흔히 접할수 있는 음식이다. 인도네시아어와 말레이어로 ‘이깐 바까르(Ikan bakar)’는 불에 구운 생선을 의미한다. 요리에는 거의 모든 종류의 생선과 다양한 해산물을 사용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오리, 메기, 잉어, 구라미(gourami: 등목어과의 식용 및 관상용 담수어), 적도미, 가다랑어, 패러갈전갱이가 자주 사용된다. 요리는 바나나 잎으로 싸서 그릴에 굽는 방식으로 요리하는데, 바나나 잎을 사용하면 생선이 그릴에 달라붙지 않고 생선 안에 수분을 유지하면서도 잎의 달콤한 향이 생선에 배기 때문이다. 이깐 바까르는 칠리고추, 블라찬, 라임, 소금, 설탕을 한데 섞어 으깨어낸 말레이시아식 삼발 '삼발 블라찬(Sambal belacan)'이나 칠리고추, 샬롯, 스위트소이소스를 첨가하여 만든 '삼발 케캅(Sambal kecap)'을 곁들여 먹는다. 조리법물과 칠리 파우더를 섞어 페이스트와 같이 걸쭉하게 만든다. 푸드 프로세서에 구운 블라찬과 칠리 페이스트, 샬롯, 양파, 레몬그라스, 마늘, 생강, 양강근, 터메릭, 라임 주스, 소금, 설탕을 넣어 곱게 갈아서 양념을 만든다. 생선은 반으로 잘라서 소금과 물로

노브고로드 역사기념물군과 주변 건축물

노브고로드 역사기념물군과 주변 건축물

러시아의 북서부 도시 노브고로드에 위치한 세계유산이다. 러시아 정교회의 중심지이자 최초의 수도였던 노브고로드의 역사를 보여주는 많은 건축물들이 남아있다. 11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지어진 성 소피아 대성당, 다면궁, 유리에프 수도원 등이 유명하다. 199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적은 중앙 아시아(Central Asia)와 북부 유럽 사이에 고대 무역 로가 지나는 지역인 노브고로드(Novgorod)에 위치하고 있다. '새로운 대도시'란 의미를 가진 이 도시는 9세기 러시아의 최초의 수도가 된 곳으로 볼코프 강(Volkhov River)을 따라 자리 잡고 있다. 노브고로드에는 그 지역이 가진 중요성과 오랜 역사만큼 유서 깊은 교회와 수도원들이 많이 세워져 있다. 이 수많은 종교 건축물들은 노브고로드를 정교회(Orthodox)와 러시아 건축의 상징이자 중심지로 만들었다.성 소피아 대성당(Saint Sophia Cathedral), 다면궁(Palace of Facets), 유리에프 수도원(Yuriev Monastery), 성 니콜라스 대성당(St. Nicholas Cathedral), 수석 대주교의 집 등이 대표적 건축물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11세기 중반에 지어진 성 소피아 대성당이다. 야로슬라프 1세 (Yaroslav I the Wise, 978~1054)의 아들이었던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Vladimir Yaroslavich , 1020~1052) 왕자의 원조로 지어졌다. 금색과 은색이 조화를 이루는 건축물로 러시아 건축의 기원적인 요소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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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성균관

고려말과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한국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이다.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바꾸면서부터이다. 1308년(충선왕 1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 때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성균관에는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大司成)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제주(祭酒)·악정(樂正)·직강(直講)·박사(博士)·학정(學正)·학록(學錄)·학유(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儒生)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에의 입학 기회를 주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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