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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골

샤를 드골

프랑스의 군인·정치가. 알제리민족자결정책, 알제리 독립 가결로 알제리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프랑스 경제의 가장 큰 장애를 제거했다. 드골 체제를 일단 완성시킨 후 ‘위대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민족주의를 부흥하기 위하여 주체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릴 출생.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생시르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전하여 중상을 입고 독일군에 포로가 된 적도 있다. 1922년 모교의 교관, 이어서 원수 H.P.페탱의 부관으로 근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기갑사단장 ·국방차관으로 있었고,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런던으로 망명하여 대독항전을 주장, 자유프랑스위원회를 조직하여 페탱이 이끄는 비시(Vichy) 정부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43년 알제리에서 결성된 국민해방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대독(對獨)항쟁을 계속하였다. 1944년 파리에 귀환,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었고, 1945∼1946년 총리 ·국방장관, 1947년 프랑스국민연합(RPF)을 조직, 1951년 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으나, 1953년 RPF를 해체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1958년 알제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제4공화정이 붕괴될 위기에 몰리자 다시 정계에 복귀할 뜻을 밝혔다. 그 해 6월 총리가 되었고, 9월 28일 헌법개정 국민투표에 의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의회의 권한을 약화시킨 제5공화정을 발족시켰고, 10월 그를 지지하는 신공화국연합(UNR)을 결성, 11월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되고, 5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1년 1월 알제리민족자결정책, 1962년 4월 알제리의 독립을 국

칼바싸

칼바싸

다진 육류를 동물의 창자에 채워 만든 러시아식 전통 소시지. 다진 육류에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향신료를 첨가한 다음 동물의 창자에 채워 넣은 러시아식 소시지이다. 주로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사용하지만, 양고기, 닭고기, 꿩고기, 말고기, 오리고기, 토끼고기 등을 넣어 만들기도 한다. 열처리 방법과 재료 배합 비율, 훈제 및 건조 정도, 형태와 모양 등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칼바싸가 유통된다. 러시아인들의 주요 식재료 중 하나이며, 얇게 썰어 빵이나 치즈에 곁들여 먹거나 샐러드로 만들어 먹는다. 또한 조리를 하지 않은 칼바싸는 그 자체로 러시아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술안주가 된다. 역사 칼바싸의 어원에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손으로 다져서 만든 고기'라는 뜻의 투르크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칼바싸는 고대 루시의 12세기 노브고로드공국 시대부터 전수되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초의 기록은 16세기에 쓰인 고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문헌에는 '돼지의 창자에 밀가루와 계란, 메밀죽을 섞어 함께 다진 육류를 채운 음식'으로 칼바싸를 소개하고 있다. 칼바싸가 러시아 전역에 퍼지게 된 것은 18세기 제정 러시아 시대의 표트르 1세(1672~1725) 시절 독일의 소시지가 러시아에 알려지면서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독일의 소시지 생산 기술을 빠르게 습득한 후, 여

단양 신라 적성비

단양 신라 적성비

신라 진흥왕 때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의 적성(赤城)에 세워진 비석. 1979년 5월 22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1979년 5월 22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 93cm, 윗너비 107cm, 아랫너비 53cm이다. 정확한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545년(진흥왕 6) 이전, 550년, 551년 등 각기 다른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1978년 1월 단국대학교박물관 조사단이 발견하였다. 단단한 화강암을 물갈이한 뒤 그 위에 직경 2cm 내외의 글자를 음각하였다. 윗부분은 파손되었으나 좌우 양측면은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비문은 전체 22행에 각 행당 20자씩 새겨져 있지만, 제20행에서 제22행까지는 18~19자씩만 있어서 전체 글자수는 430자 내외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글자 수는 비면의 288자와 주변의 발굴을 통하여 수습된 21자를 합쳐 309자이다. 오랫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었던 탓인지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는 거의 없지만, 윗부분이 파손되어 전체 내용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문장은 순수한 한문식이 아니라 신라식 이두문(吏讀文)과 한문이 섞여 있다. 서체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해서체이지만 예서풍이 강하게 남아 있다. 이 비는 이사부(伊史夫)를 비롯한 여러 명의 신라 장군이 왕명을 받고 출정하여, 고구려 지역이었던 적성을 공략하고 난 뒤, 그들을 도와 공을 세운 적성 출신의 야이차(也尒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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