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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알리

무함마드 알리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으로 재임하였으며(1805-1848), 1841년에 오스만투르크제국에서 독립한 뒤 독자적인 왕조를 세워 이집트와 수단을 통치했다. 오스만 제국 치하의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카발라(Kavala)에서 태어났다.이집트는 원래 1517년부터 오스만투르크제국의 통치를 받았으나, 맘룩 왕조(Mamluk dynasty)출신 행정관들이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18세기에는 맘룩 출신 행정관들이 부패와 폭정을 일삼았으나 오스만투르크제국은 이에 무능하게 대처했고, 대중의 반란도 체제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결국 이집트는 1798년 나폴레옹의 원정으로 프랑스에 점령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던 아부 키르(Abu-Kir) 전투에서 영국 해군에게 패했으며, 이후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했으나 아크레(Acre)에서 오스만투르크제국에 패한 뒤 1801년에 이집트에서 철수한다. 기존의 맘룩 행정관들의 쇠퇴와 프랑스 철수로 인해 야기된 힘의 공백 상태를 채운 것이 마케도니아 출신의 무함마드 알리였다. 무함마드 알리는 1805년 정적들을 제거하고 울라마(Ulama, 이슬람 법학자)와 지방세력가들로부터 인정받았으며, 이후 오스만투르크제국 총독인 자신에 대한 반란 제압을 빌미로 술탄으로부터 군사력을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무함마드 알리는 나일 강을 통해서 이집트 전역을 쉽게 통치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1811년 맘룩 학살을 끝으로 모든 정치적 경쟁세력을 제거했다. 또한 종교세 명목으로 부유한 울라마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며, 대

포아차

포아차

밀가루, 우유, 설탕 등으로 만든 반죽을 치즈 등으로 속을 채워 구워낸 빵으로, 튀르키예의 전통적인 요리이며 아침 식사로 즐겨 먹는다. 치즈로 속을 채워 구워낸 튀르키예의 빵이다. 발칸 반도, 카르파티아 분지에서도 먹으며 지역별로 부르는 명칭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튀르키예에서는 ‘포아차(Poğaça),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슬로베니아에서는 ‘포가차(Pogača)’, 헝가리에서는 ‘포가처(Pogácsa)’, 루마니아에서는 ‘포가체(Pogace)’라고 한다. 본래 벽난로에서 구워졌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븐에서 구워지기 시작하였다. 포아차는 작고 둥근 모양의 한입 크기부터 보다 큰 크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만들 수 있다. 주로 짭짤하게 만들며 빵의 속을 아무것도 넣지 않을 수도 있고, 치즈나 다진 고기, 감자, 올리브 등을 넣어 만들수도 있다. 헝가리의 포가처는 한입 크기의 작은 페이스트리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나 간혹 그보다 큰 크기로 만들기도 한다. 맛은 달콤하거나 짭짤한 맛이 일반적이며 치즈, 양배추, 감자, 베이컨, 호박씨 등을 첨가하기도 한다. 슬로베니아의 포가차는 손님을 환영하기 위해 와인을 곁들여 대접하는 전형적인 웰컴 브래드로, 둥글고 납작한 모양을 갖는다. 튀르키예에서는 포아차를 흔히 제과점에서 만나볼 수 있으며, 주로 간단한 아침 식사로 즐겨 먹는다. 신선한 과일이나 꿀 등을 곁들여 먹는다.  조리법

리비우 역사지구

리비우 역사지구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 지역에 있는 중세 역사 유적지이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인 르비우는 중세 후기에 세워진 이후 수 세기에 걸쳐 번영을 누렸으며 행정, 종교 및 상업의 중심지로서 발달하였다. 이곳의 중세도시 지형은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그곳에 살았던 다양한 민족 공동체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탁월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정 면적은 약 1.2㎢이며 완충 지역의 면적은 약 24,41㎢이다.  르비우는 5세기와 6세기부터 정착지가 존재했던 위치에 중세 후기 경 세워진 도시이다. 무역과 정치 발전에 유리한 지리적 요건으로 인하여 행정, 종교, 상업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건축 및 예술적 유산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영향을 받았던 동유럽의 전통을 반영한다. 르비우 역사지구는 성과 주변 지역, 도심 지역을 포함하는 주요 지역과 성 유리 대성당(St. Yuri’s Cathedral)이 있는 남서쪽 지역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시 발달의 여러 단계를 알아볼 수 있는 많은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이 캐슬(Lviv High Castle, Vysokyi Zamok)과 성 주변 지역인 피드잠체(Pidzamche)는 가장 오래된 주요 지역으로 그 역사는 5세기로 거슬러 올라 간다. 르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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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

2·8독립선언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재일 유학생이 발표한 독립선언.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미국 대통령 T.W.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가 계기가 되었고, 직접적으로는 1918년 12월 15일자 《The Japan Advertizer》에서 재미 한국인들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는 보도와, 12월 18일자에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한국을 비롯한 약소민족대표들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된다고 하는 보도에 접한 재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높아졌다. 이에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9년 1월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송계백(宋繼白)을 국내로, 이광수(李光洙)를 상해로 파견하였다. 2월 8일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 및 일본정부, 일본국회 등에 발송한 다음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강제 해산으로 10명의 실행위원을 포함한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되었다. '2·8독립선언서'는 '3·1독립선언서'보다 훨씬 강경하게 일제의 침략을 고발하고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3·1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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