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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아스터교

조로아스터교

조로아스터교는 예언자 조로아스터(Zoroaster)의 가르침에 종교적·철학적 기반을 두고 있으며,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믿는 고대 페르시아 종교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철학자이자, 오늘날 예언자로 불리는 조로아스터(Zoroaster)에 의해 창시된 종교로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며,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은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믿는다 하여 스스로를 마즈다 예배교(마즈다야스나 : Mazdayasna)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배화교(拜火敎), 중국에서는 현교(祆敎)라고 하여 삼이교(三夷敎)의 하나로 꼽혔다.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BC 599~330)에 오늘날의 이란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까지, 서쪽으로는 페르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초기 전파 과정에서는 여러 남신, 여신 등을 믿는 고대 토착 종교와 혼합되었으며, BC 4세기 경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후에 파르티아 제국 시대(BC 247~AD 226)에 이르러 유일신 신앙이 확립되었으며,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출현하며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아 발전시켰다. 사산 왕조(AD 224~651)는 조로아스터교 이외의 종교는 박해했으며, 이 시기에 경전 《아베스타(Avesta)》가 집대성되었고, 일상어인 팔레비어 해설판이 쓰여지기도 했다.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 사상, 내세관, 선과 악으로 대비되는 세계관 등은 유대교·그리스도교·불교·이슬람교 등과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받

파브 바지

파브 바지

으깬 토마토, 양파, 감자 등의 야채에 각종 향신료를 넣고 만든 카레와 빵을 곁들여낸 인도의 요리이다. 으깬 야채로 만든 카레와 빵을 곁들여낸 음식이다. 인도 마하라슈트라주의 주도인 뭄바이에서 유래하였다. 때문에 뭄바이에서 특히 인기 있는 음식이며, 현재는 인도전역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요리는 한끼 식사는 물론 간식으로도 먹는다. ‘파브(Pav)는 인도식 빵을 의미하는 것으로 버터에 구워서 사용하며, ‘바지(Bhaji)’는 마라티어(Marathi: 마하라슈트라주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야채 혹은 야채를 베이스로 하여 만든 음식을 의미한다.   파브 바지는 1861~65년에 벌어진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인한 면화 가격의 폭등으로 인해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인도는 면화의 주요 공급 국가였기 때문에, 뭄바이 면화 거래소는 남북전쟁 기간에 밤늦은 시간까지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은 늦은 시간의 허기를 해결하기 위해 길거리 노점상 상인들에게 팔고 남은 야채를 으깬 것과 버터, 빵을 함께 받았는데, 이것이 바로 파브 바지의 기원이 되었던 것이다.  파브 바지의 종류 ‘카티아와르 파브 바지(Kathiawar pav bhaji)’는 구자라트주에 있는 카티아와르반도의 지역 향신료를 넣고 만드는 것으로, 주로 버터밀크와 함께 먹는다.<

쿠엥카 성곽도시

쿠엥카 성곽도시

스페인 카스티야라만차(Castile-La Mancha) 자치주 쿠엥카 지방에 있는 역사도시 유적. 독특한 지형을 이용하여 건설한 중세 요새도시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1996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베리아반도의 메세타 남동부 해발 900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9세기 무렵 이곳을 점령한 이슬람교도들이 후카르(Júcar)강과 우에카르(Huécar)강 사이의 언덕 위에 세운 요새였으나 뒤에 도시로 발달하여 후(後)우마이야왕조의 거점이 되었다. 이후 1177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Alfonso XIII)가 다시 점령하였고 1189년에는 주교좌가 설치되어 카스티야의 종교·행정·경제의 중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도시의 전성기인 16세기에는 인구가 1만 6,000명에 이르렀으며 도시의 영역도 더욱 넓어졌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요새에는 수도원과 성당이 들어섰고 요새 안에 거주하던 상류계층은 낮은 도시 중심부로 이주하였다. 17세기에 들어서자 경제의 기초를 이루던 직물업의 쇠퇴로 인구가 4,000여 명으로 줄어들었으나, 도시의 종교적인 역할은 더욱 커졌다. 17세기 후반부터 도시를 재건, 복구하였으며 1940년대 이후에는 본격적인 복원작업을 시행하였다. 요새도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옛시가지에는 성당과 수도원 등의 종교건축물과 귀족들의 저택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13세기 중반에 고딕 양식으로 건립된 쿠엥카대성당, 산미겔성당(Church San Miguel), 18세기에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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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

허목

조선 중기 학자 겸 문신. 사상적으로 이황·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 전서(篆書)에 독보적 경지를 이루었다. 문집 《기언(記言)》, 역사서 《동사(東事)》등을 편집하였다.
본관 양천. 자 문보(文甫)·화보(和甫). 호 미수(眉叟). 시호 문정(文正). 현감 허 교(許喬)의 아들이며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사위이다. 경기도 연천의 향리이고 서울에서 성장하였지만 영남 남인의 거두 정구(鄭逑)에게 학문을 배웠다. 1626년(인조 4) 유생으로서 동학(東學)의 재임(齋任)을 맡고 있을 때, 생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왕으로 추숭해 나가려는 인조의 뜻을 지지한 박지계(朴知誡)에게 그 이름을 유생 명부에서 지우는 벌을 가했다가 과거 응시를 금지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과거와 벼슬에 뜻을 끊고 광주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여러 곳을 이주한 끝에 1646년 연천에 돌아왔다. 1650년(효종 1) 이후 정릉참봉·내시교관·조지서별좌·공조좌랑·용궁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거나 곧 사직하였다. 1657년 공조정랑·사복시주부를 거쳐 1659년에 장령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의 정책에 반대하는 등 중앙 정부에서의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659년에 현종이 즉위한 후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다시 장령이 되었다. 이때 효종에 대한 인조 계비 조대비(趙大妃)의 복상 기간을 서인 송시열 등이 주도하여 1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므로 3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송(禮訟)논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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