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통합검색

메인 주요 글

주요 아티클

에이브러햄 링컨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재임 1861~1865). 남북 전쟁에서 북군을 지도하여 점진적인 노예 해방을 이루었다.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나 이듬해 암살당하였다. 게티즈버그에서 한 연설 중 유명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라는 불멸의 말을 남겼다. 켄터키주(州) 호젠빌 출생.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였기 때문에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지만, 독학하여 1837년 변호사가 되어 스프링필드에서 개업하였으며, 1834~1841년 일리노이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47년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미국멕시코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인기가 떨어져 하원의원직은 1기로 끝나고 변호사 생활로 돌아갔다. 1850년대를 통하여 노예문제가 전국적인 문제로 크게 고조되자 정계로 복귀하기로 결심하고, 1856년 노예반대를 표방하여 결성된 미국 공화당에 입당하여, 그해 대통령선거전의 공화당후보 플레먼트를 응원함으로써 자신의 웅변이 알려지게 되었다.1858년 일리노이주(州) 선출의 상원의원선거에 입후보하여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의 S.A.더글러스와 치열한 논전을 전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더글러스와의 공개논전에서 행한 “갈려서 싸운 집은 설 수가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 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믿는다” 는 유명한 말을 하여 더글러스의 인민주권론을 비판하였다. 선거결과에서는 패하였으나, 7회에 걸친 공개토론으로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고,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받았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것은 노예제에 대한 그의 견해가 과히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야로슬라블 역사지구

야로슬라블 역사지구

러시아의 서북부 도시 야로슬라블에 위치한 세계유산이다. 야로슬라블이 크게 번영하였던 시기인 17,18세기에 세워진 교회, 수도원, 극장, 시청 건물 등의 다양한 건축물들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2005년 유네스코에 의해 그 문화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러시아의 서부 야로슬라블주(Yaroslavl Oblast)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이 자리한 야로슬라블 주의 주도 야로슬라블(Yaroslavl)은 수도 모스크바(Moscow)에서 북동쪽으로 약 250km 떨어진 곳으로 볼가 강(Volga)과 코토로슬 강(Kotorosl River)이 합류되는 지점이다. 야로슬라블은 11세기 초 로스토프(Rostov) 공국의 변경 식민지로 처음 세워진 후 점차 그 지리적 이점을 살려 주요 상업지구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이곳은 도로와 철로 그리고 수로가 교차되는 중요한 교통 지점이다. 13세기 로스토프 공국으로부터 독립해 자치권을 획득했으며 17세기에는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18세기 야로슬라블은 카트린느 2세(Catherine II, Catherine the Great, 1729~1796, 재위 1762-1796)의 대규모의 도시 계획에 따라 신고전주의(Neo-classical)의 영향을 받은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 지역이 번영을 누리던 17세기에는 수많은 수도원과 교회들이 세워졌다. 건물들은 야로슬라블 형식(Yaroslavl type)으로 칭해지는 건축 방식으로 지어졌는데 붉은 벽돌로 건물을 지은 후 외부를 밝은 색 타일로 장식하는 것이었다

슬라이드 바로가기
효종

효종

조선 제17대 왕(재위 1649∼1659).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서의 8년간 볼모생활 중 그 설욕에 뜻을 두어, 즉위 후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다. 그러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청나라의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다.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고, 상평통보(常平通寶)를 화폐로 유통시키는 등 경제시책에 업적을 남겼다.
휘(諱) 호(淏). 자 정연(靜淵). 호 죽오(竹梧). 시호 명의(明義). 인조(仁祖)의 둘째아들.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 비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지고,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세자(世子:昭顯世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있었다. 인조의 미움을 받은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와 1645년 갑자기 변사(變死)하자 세자에 책봉되어 1649년 인조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소현세자의 맏아들 석철이 종손으로 원손이었지만 인조에 의해 폐위되고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이를 두고 비난하는 여론이 높았다. 후일 예송의 견해를 달리하는 서인과 남인 간에 정쟁을 일으키게 된다. 1649년 왕에 즉위하자 인조 말년부터 세력을 떨치던 공서파(功西派)의 낙당(洛黨) 김자점(金自點)을 파직시키고 청서파(淸西派)를 등용했으며, 오랫동안의 볼모생활 중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품고 그 설욕에 뜻을 두었다. 효종은 그와 뜻을 같이하는 신하들과 함께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하여 군사를 양성하고 군비를 확충하였다. 하지만 북벌정책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목소리도 높았으며 무관을 하대하는 풍조는 여전했다. 당시 효종의 북벌정책을 지지한 박서, 원두표(元斗杓) 등

포토커뮤니티

지구촌 여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