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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

잔다르크

15세기 전반에 영국의 백년전쟁 후기에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적인 소녀이다. 1429년의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샤를 황태자(뒷날의 샤를 7세)를 도왔다. 가톨릭의 성녀(聖女). 로렌과 샹파뉴 사이에 있는 동레미라퓌셀의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인 농가에서 태어났다. 1429년의 어느 날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서쪽으로 가서 루아르 강변의 시농성(城)에 있는 샤를 황태자(뒷날의 샤를 7세)를 방문하였다. 당시의 프랑스는 북반부를 영국군 및 영국에 협력하는 부르고뉴파(派)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왕위도 1420년의 트루아의 조약에 따라 샤를 6세 사후에는 영국왕 헨리 5세가, 또 그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 헨리 6세가 계승하도록 되어 있어, 황태자 샤를은 제외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잔 다르크는 샤를을 격려하고 그에게서 받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영국군의 포위 속에서 저항하고 있던 오를레앙 구원에 앞장서서 싸웠다. 영국군을 격파하여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데 이어 각지에서 영국군을 무찔렀다. 흰 갑주에 흰 옷을 입고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잔 다르크의 모습만 보고도 영국군은 도망갔다고 전해진다. 이리하여 그 해 5월 상순, 영국군은 오를레앙에서 완전히 패퇴하였다. 랭스까지 진격한 잔 다르크는 이곳 성당에서 전통적인 전례에 따라 샤를 7세의 대관식(戴冠式)을 거행토록 하였다. 이에 샤를 7세는 영국의 헨리 6세에 앞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잔 다르크에 대한 왕의 측근들의 질시와 선망 속에서도 잔 다르크는 더욱 충성을 하였다.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

잠발라야

잠발라야

냄비에 고기, 해산물, 야채 등의 재료를 향신료와 함께 볶고 육수를 부어 쌀과 함께 끓여낸 쌀 요리로,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주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고기, 해산물, 야채, 향신료 등을 첨가하여 만든 쌀 요리이다.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주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스페인 요리인 파에야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스페인, 프랑스, 아프리카, 아메리카 원주민의 음식문화와 지역의 재료에 영향을 받아 받들어졌다. 잠발라야는 재료가 저렴한데다 냄비 하나로 요리가 가능한 요리로, 당대 지역사회에서 가장 큰 공공 집회였던 교회 바자회에 등장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이후 결혼식, 집회, 가족 모임 등과 같은 행사에 등장하며 대중적인 요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잠발라야는 크게 레드 잠발라야(red jambalaya)와 브라운 잠발라야(brown jambalaya)로 구분한다. 뉴올리언즈에서 즐겨 먹는 레드 잠발라야는 크레올 요리에 영향을 받아 크레올 잠발라야라고도 하는데 토마토가 들어가고 육류보다는 해산물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브라운 잠발라야는 남부 루이지애나의 시골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며 케이준 요리에 영향을 받아 케이준 잠발라야라고도 한다. 토마토가 들어가지 않으며 햄이나 훈제 소시지, 닭고기 혹은 수렵육 등의 구운 고기가 첨가되어 요리가 갈색을 띠는 것이 특징적이다. 잠발라야에 흔히 쓰이는 고기로는 프랑스 소시지인 앙두이(andouille)와 같은 훈제한 돼지고기 소시지이며 이는 종종 닭고기와 짝을 이루어 쓰인다.

체스키 크룸로프 역사지구

체스키 크룸로프 역사지구

체코 남체코주에 있는 도시유적. 프라하에서 남서쪽으로 200여 km 떨어진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근처에 체스키크룸로프가 있다. S자로 완만하게 흐르는 블타바 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작은 도시로 붉은 지붕과 둥근 탑이 어우러져 동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체코가 공산 국가였던 시절에는 그저 낙후된 도시에 불과했던 체스키크룸로프는 1992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300여 개 이상의 건축물이 문화 유적으로 등록되었으니 도시 전체가 유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3세기 남 보헤미아의 비테크 가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고딕 양식의 성을 짓기 시작한 것이 체스키크룸로프의 시작이다. 이후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건물들이 일부 추가 되었으나 18세기 이후에 지어진 건물은 거의 없다. 중세 마을의 특징이 가장 잘 살아 있는 곳으로 평가 받고 있다. 13세기 세워진 체스키크룸로프 성은 프라하 성에 이어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성이다.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하면서 둥근 지붕의 탑과 회랑 등이 추가 되었다. 성 안에는 영주가 살던 궁전과 예배당, 조폐소, 바로크식 극장과 정원이 재현되어 있어 중세 귀족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다. 구시가의 중심지는 중세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스보르노스티 광장으로 주변에 후기 고딕 양식의 성비투스 성당 등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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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최치원

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다. 중국 당 나라에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신라로 돌아온 뒤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유교(儒敎)ㆍ불교(佛敎)ㆍ도교(道敎)에 모두 이해가 깊었고, 유ㆍ불ㆍ선 통합 사상을 제시하였다. 수많은 시문(詩文)을 남겨 한문학의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자(字)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또는 해부(海夫)이다. 고려 현종(顯宗) 때인 1023년(현종 14년)에 내사령(內史令)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되며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 지금의 경주)’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오늘날 경주(慶州) 최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 원년인 857년에 태어났으며, 부친은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때에 숭복사(崇福寺) 창건에 참여했다고 전해지는 견일(肩逸)이다. 48대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때인 868년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唐) 나라로 유학을 떠나, 874년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2년 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뤄양[洛陽] 등지를 떠돌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여 5수(首) 1권(卷)으로 된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100수 1권으로 된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30수 1권으로 된 <잡시부(雜詩賦)> 등의 시문집을 지었으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 뒤 876년 선주(宣州) 율수현(溧水縣, 지금의 江蘇省 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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