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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대공황

1929년에 시작된 사상 최대의 공황. 1929년의 대공황(Depression of 1929) 또는 1929년의 슬럼프(Slump of 1929)라고도 한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街)의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대폭락한 데서 발단된 공황은 가장 전형적인 세계공황으로서 1933년 말까지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여기에 말려들었으며, 여파는 1939년까지 이어졌다. 이 공황은 파급범위 ·지속기간 ·격심한 점 등에서 그 때까지의 어떤 공황보다도 두드러진 것으로 대공황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배후에는 만성적인 과잉생산과 실업자의 문제가 현재화(顯在化)되고 있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10월의 주가 대폭락은 경제적 연쇄를 통하여 각 부문에 급속도로 파급되어, 체화(滯貨)의 격증, 제반 물가의 폭락, 생산의 축소, 경제활동의 마비상태를 야기시켰다. 기업도산이 속출하여 실업자가 늘어나, 33년에는 그 수가 전 근로자의 약 30 %에 해당하는 1,500만 명 이상에 달하였다. 이 공황은 다시 미국으로부터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제국으로 파급되었다. 자본주의 각국의 공업생산고는 이 공황의 과정에서 대폭 하락하고 1932년의 미국의 공업생산고는 1929년 공황발생 이전과 비교하여 44 % 저락하여 대략 1908∼1909년의 수준으로 후퇴하였다

나시 다강

나시 다강

코코넛 밀크, 샬롯, 생강 등을 첨가하여 지은 밥에 생선이 들어간 굴라이를 곁들여낸 음식으로, 말레이시아의 요리이다. 코코넛 밀크와 생강 등을 첨가한 밥에 생선을 넣어 만든 굴라이를 곁들인 음식이다. 말레이시아의 요리이며, 말레이시아어로 ‘나시(Nasi)’는 밥을, ‘다강(Dagang)’은 무역이라는 뜻을 갖는다. 요리는 주로 아침식사로 먹으며, 특별한 행사나 기념일에 먹기도 한다. 나시 다강에는 보통 붉은색을 띠는 쌀인 레드 라이스(red rice)나 타이 홈 말리 라이스에 찹쌀을 섞어 지은 밥을 사용하. 곁들이는 음식으로는 야채 피클, 삶은 달걀, 구운 코코넛, 삼발, 끄루뽁 이깐(Krupuk ikan) 등이 사용된다. 조리법 레드 라이스 혹은 타이 홈 말리 라이스에 찹쌀을 섞은 쌀로 밥을 짓는다. 약 15분 뒤 밥이 반쯤 익으면 코코넛 밀크, 다운 판단, 다진 샬롯과 마늘, 생강을 첨가하고 마저 밥을 짓는다. 참치에 소금을 뿌리고 약 20분간 찐다. 샬롯, 양강근, 생강, 터메릭은 잘게 썰어 블랜더에 갈아 페이스트를 만든다. 오일을 두른 냄비에 페이스트를 넣고 볶다가 카레 파우더를 넣어 약 15분간 더 볶은 뒤, 코코넛 밀크를 넣어 끓인다. 여기에 쪄 둔 참치, 새눈 고추, 설탕, 소금을 넣고 약 20분간 끓여서 굴라이를 완성한다. 접시에 밥을 올리고, 굴

박상진

박상진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을 역임하였으며,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친일파 근절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본관 밀양(密陽). 자(字)는 기백(璣伯)이며 호는 고헌(固軒)이다. 승지(承旨) 박시규(朴時奎)의 아들로, 경상남도 울산(蔚山)에서 1884년 12월 7일에 출생하였다. 큰아버지인 홍문관 교리(校理) 박시룡(朴時龍)에게 입양되었다. 향리에서 한학을 배우다 1902년부터 의병장 출신의 서울 평리원판사 및 원장으로 재직하였던 허위(許蔿)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7년에서 1910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공부하며 신학문을 익혔다.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으나 식민지 관리가 되지 않겠다 하여 사퇴하였다. 이후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위의 형인 허겸과 손일민(孫一民)·김대락(金大洛)·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귀국하여 대구에서 독립운동의 연락본부이자 재정적 지원을 목적으로 곡물상회인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여 국내를 비롯한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 등의 곡물상과의 연락망을 구축하였다. 1915년에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결성된 독립군 지원 단체이자 비밀결사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에 참여 및 활동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합작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 총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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