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통합검색

메인 주요 글

주요 아티클

렘브란트 판 레인

렘브란트 판 레인

네덜란드의 화가. 그의 회화가 성숙함에 따라 외면적인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것, 인간성의 깊이를 그리고 싶은 생각이 절실해지면서 종교적(또는 신화적) 소재나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유화와 에칭에서 유럽 회화사상 최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1606년 7월 15일 조이트홀라드주 레이덴에서 출생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17세기 유럽 회화사상 최대의 화가이다.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레이덴대학교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레이덴의 화가인 야콥 반 스바넨부르크에게 배우고, 이어 암스테르담에 나와 P.라스트만의 문하에 들어갔다. 1624년 레이덴으로 돌아와 이듬해부터 독립하여 아틀리에를 열었다. 1632년까지 완전한 독학으로 친척, 이웃노인, 성서에서 소재를 얻어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1632년 암스테르담 의사조합으로부터 위촉받은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의 호평을 계기로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였다. 그 후 약 10년간은 생활이나 명성에 있어서도 가장 혜택받은 시기였다. 1634년 명문가문의 딸 사스키아 판 오이렌부르흐와 혼인하여 당시의 세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첫째 가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많은 수입과 제자를 모았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성숙함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 기호였던 평면적인 초상화 등에 만족할 수 없게 되어 외면적인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것, 인간성의 깊이를 그리고 싶은 생각이 절실해지면서 종교적(또는 신화적) 소재나 자화상이 많아졌다. 따라서 1642년의 명작 《야경(夜警)》의 제작을 고비로 갑자기 세속적 명성에서 멀어졌다. 이 작품은

남프릭눔

남프릭눔

구운 풋고추에 피시소스, 코리앤더, 라임주스, 샬롯, 마늘 등을 첨가하여 만든 타이의 소스로, 남프릭의 한 종류이다. 구운 풋고추를 주재료로 하여 만든 걸쭉한 질감의 연두색 소스이다. 남프릭의 한 종류이며, 타이 북부지역의 특산품이기도 하다. 타이어로 ‘남프릭(น้ำพริก)’은 고추, 마늘, 라임, 피시소스, 까삐(กะป)를 첨가하여 만든 매운맛의 타이 소스를 의미하며 '눔(หนุ่ม)'은 프릭눔(พริกหนุ่ม)으로도 불리는 밝은 연두색에 길쭉하고 큰 크기를 가진 타이의 칠리 고추를 뜻한다.  남프릭눔은 튀긴 돼지 껍데기 요리인 캡무, 오이, 상추와 같은 야채, 삶은 달걀, 밥, 그 밖에 여러 메인요리에 곁들일 수 있는 디핑 소스로 쓰인다. 한편 요리에 사용되는 눔은 바나나 칠리(Banana Chili)로 대체할 수 있다.  조리법 프릭눔, 샬롯, 마늘을 그릴에 올려 불에 구운 다음 식힌다. 겉 껍질과 줄기 등 탄 부분을 벗겨낸다. 실란트로는 잘게 잘라 놓는다. 절구에 프릭눔, 샬롯, 마늘을 넣어 으깨어준다. 여기에 피시소스, 라임주스, 코리앤더를 넣고 잘 섞어준다. 맛을 본 뒤 필요에 따라 설탕, 라임주스, 피시소스를 추가한다. 이 상태로 30분간 실온에 둔다. 완성된 남프릭눔은 작은 볼에 담아낸다. 접시 중앙에 작은 볼에 담은 남프릭눔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의 백색 기념물군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의 백색 기념물군

러시아의 서부 블라디미르와 수즈달 두 도시에 있는 중세 석회암 건축물들이다. 대부분 성채, 교회, 수도원으로 지어졌으며 중세 러시아의 건축 양식과 예술의 발전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유럽 동부에서 아시아 북부 지방까지 넓게 걸쳐 있는 국가 러시아(Russia)의 세계유산이다. 러시아 서부 블라디미르 주(Vladimir Oblast)에 위치한 두 도시 블라디미르(Vladimir)와 수즈달(Suzdal)에 자리 잡고 있다. 블라디미르는 블라디미르 주의 중심 도시로 수도 모스크바(Moscow)에서 동쪽으로 200km 떨어져 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수즈달은 블라디미르에서 26km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은 중앙 러시아의 예술 중심지로 국가의 건축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화려하고 장대한 공공건물과 종교 건물들은 보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세계 유산으로 등록된 중세 석회암 건축물은 총 8개이다.  성 데메트리우스 성당(the Cathedral of Saint Demetrius)과  성모 몽소승천 성당(Cathedral of the Assumption of the Virgin), 황금 문(Golden Gate), 안드레이 보골류프스키 성(The castle of Andrey Bogolyubsky), 네를 성모 마리아 교회(Church of the Intercession of the Holy Virgi

슬라이드 바로가기
조헌

조헌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 등 승병과 합세해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본관 백천(白川). 자 여식(汝式). 호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 문열(文烈).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생.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정주교수(定州敎授)가 되고, 1572년(선조 5) 정자(正字)로 왕이 절에 향(香)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여 삭직된 뒤 곧 저작(著作)에 기용되고, 1574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호조와 예조의 좌랑·감찰을 거쳐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남형(濫刑)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평(富平)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좌랑에 등용되어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종묘서령(宗廟署令)을 거쳐 1582년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나갔다. 1586년 공주제독관이 되어 동인이 이이·성혼을 추죄(追罪)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고향에 내려가 임지를 이탈한 죄로 파직당하였다. 1589년 동인을 공박하다가 길주에 귀양가고, 그해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나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이이의 문인 중

포토커뮤니티

지구촌 여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