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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이

푸이

중국 청(淸)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1908년 3살의 나이로 청의 12대 황제가 되었지만 1912년 신해혁명으로 퇴위했다. 1934년 일본에 의해 만주국의 황제가 되었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소련에 체포되었다가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푸이[溥儀]는 중국 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이름이다. 본래 이름은 '아이신줴뤄 푸이[愛新覺羅 簿儀]'이며, 광서제(光緖帝)의 이복동생인 순친왕(醇親王) 재풍(載豊)의 아들이다. 1908년 10월 서태후(西太后)는 동치제(同治帝)와 광서제의 뒤를 잇기 위해 푸이에게 제위를 잇게 하겠다는 교서를 발표했고, 그해 11월 14일 광서제가 죽자 푸이는 3살의 나이로 청의 12대 황제가 되었다. 연호는 '선통(宣統)'이라 했으며, 아버지인 순친왕과 광서제의 황후인 융유황태후(隆裕皇太后)가 섭정했다. 순친왕은 황족이 절대 다수로 구성된 내각을 구성하여 황족 중심의 집권화를 도모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혁명의 진압 과정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청 조정의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했다. 위안스카이는 난징[南京]에 쑨원[孫文]을 임시대총통으로 하여 수립된 중화민국(中華民國) 임시정부와 협상을 진행했다. 그리고 청을 물러나게 하고 공화정을 선포하는 대신 총통 자리를 물려준다는 쑨원의 약속을 받고, 북부의 군벌들을 동원해 공화정을 선포하도록청 왕조를 압박했다. 결국 1912년 2월 12일 융유황태후가 푸이를 대신해 퇴위 조서를 반포했고, 3월 10일 위안스카이가 베이징[北京]에서 중화민국 제2대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청 왕조는 멸망했고, 푸이는 중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푸이는 퇴위 후에도 쯔진청[紫禁城]에

쿠안 아망

쿠안 아망

빵 반죽에 버터, 설탕을 층층이 곁들여 둥글게 구워낸 케이크로, 캐러멜라이즈된 크루아상과 그 맛이 비슷하다. 프랑스 브루타뉴 레지옹의 두아른네에서 유래하였다. 빵 반죽에 버터와 설탕을 층층이 쌓아 만든 동그란 모양에 바삭한 식감을 가진 케이크이다. 프랑스 브르타뉴에서 ‘쿠안(Kouign)’은 케이크를, ‘아망(Amann)’은 버터를 뜻하여 쿠안 아망(Kouign-amann)은 버터케이크라는 의미를 지닌다. 기원 1860년경 프랑스 브르타뉴 레지옹 피니스테르(Finistère) 데파르트망(Department)에 위치한 두아른네(Douarnenez)의 제빵업자인 이브-르네 스코르디아(Yves-René Scordia)에 의해 처음으로 개발된 이후, 브르타뉴 레지옹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전통적으로 커다란 원형 케이크로 구워낸 뒤 작은 조각으로 잘라 먹는 것이 보통이나, 현대에는 머핀과 같이 작은 크기로 구워낸 쿠안 아망 또한 흔히 볼 수 있다.  조리법 따듯하게 데운 우유와 효모를 반죽기에 첨가한 뒤 거품기로 잘 저어준다. 여기에 소금과 설탕, 밀가루를 더해주고, 반죽기를 돌려 반죽을 완성한다. 볼에 밀가루를 뿌리고 반죽을 볼에 옮겨 표면에 랩을 씌운다. 반죽을 따듯한 곳에 두고 2배 정도로 부풀도록 1시간 가량 휴지한다. 반죽기에 버터, 밀가루, 설탕을 넣어 반죽기를 돌린다. 버터 반죽이 완성되면 베이킹 시트 위에 올려 감싼 뒤 밀방망이로 넓게 핀다. 버터는 따로 차가운 곳에 약 45분간 보관해놓는다. 밀가루를 뿌린

쿠로니아 모래톱

쿠로니아 모래톱

리투아니아와 러시아 두 국가에 걸쳐져 있는 모래톱이다. 클라이페다에서 52km에 이르는 지역은 리투아니아에, 삼비아 반도에 이르는 나머지 46km는 러시아에 속해있다. 2000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발트해(Baltic Sea) 연안에 위치한 리투아니아(Lithuania)와 러시아(Russia) 두 국가에 속해 있는 세계유산이다. 쿠로니아 모래톱(Curonian Spit)은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 주(Klaipeda Region)의 네링가(Neringa)와 클라이페다(Klaipeda) 사이의 지역뿐 아니라 러시아 칼리닐그라드 주(Kaliningrad Region)의 제레노그라드스크(Zelenogradsk) 지방까지 뻗쳐 있다.  총 길이 98km에 이르는 긴 모래언덕으로, 너비는 위치에 따라 400m에서 3,800m까지 다양하다. 이 쿠로니아 모래톱을 경계로 리투아니아와 러시아를 모두 접하고 있는 크로니안 석호(Curonian Lagoon)가 발트 해(Baltic Sea)와 분리된다. 리투아니아의 항구 도시 클라페이다와 러시아의 삼비아(Sambia) 반도가 모래톱의 양끝이다. 모래톱의 52km는 리투아니아에 속해있으며 나머지 46km는 러시아에 속해있다.  쿠로니아 모래톱은 선사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형성 당시 바람과 파도에 의해 모래톱은 생성과 사라짐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곳에 거주를 시작한 인간들은 모래톱을 보수하고 나무를 다시 심어 그 삶의 터전을 지켜나갔다. 그러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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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수원 화성

1796년 정조가 그의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조한 성.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축성 당시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원 화성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뒤주 속에서 불운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풍수지리학상 명당 자리인 화산으로 이전하고 그 부근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 현재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또한 화성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그 필요를 절감한 수도 서울의 남쪽 방어기지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당쟁이 극심했던 정세를 쇄신하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정조 자신의 원대한 구상을 위한 새로운 개념의 계획적 신도시로 건설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극진한 효심을 기반으로 군사, 정치, 행정적 목적까지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화성의 건설에 당대 동서양의 과학과 기술의 성과가 총결집되었고, 단원 김홍도를 비롯한 예술가들, 번암 채제공과 실학의 거두 정약용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그 결과 화성은 근대 초기 성곽건축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성벽의 외측을 쌓되 내측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화강석과 벽돌을 함께 축성의 재료로 사용한 전석교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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