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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

나린

삶은 고기에 반죽을 얇게 썰어 익힌 국수를 곁들여낸 음식으로, 우즈베키스탄의 전통적인 요리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즐겨 먹는다. 삶은 고기에 국수를 곁들여낸 음식이다. 우즈베키스탄의 전통적인 요리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특히 인기 있는 음식이며 키르기스스탄과 위구르족 등 중앙아시아에서더 즐겨 먹는다. ‘노린(Norin)’이라고도 한다. 나린은 지역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른데, 키르기스스탄의 나린은 본래 고기에 양파 소스로만 구성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국수를 첨가한 구성으로 변형되어 만들어지며, 위구르에서는 잘게 썬 고기를 국수와 섞은 뒤, 양고기 육수를 부어 먹는 방식으로 만든다. 이에 비해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삶은 고기를 잘게 썰어 국수와 함께 섞어낸 기본적인 형태로 나린을 먹는다.   요리에는 전통적으로 말고기가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말고기 외에도 양고기 혹은 소고기가 흔히 사용되며 종종 송아지고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요리에는 카자흐스탄의 말고기 소시지인 카지(Kazy)가 쓰이기도 하는데, 이는 고기와 함께 조리되거나 완성된 요리에 곁들여 먹기도 한다. 나린은 환대의 의미를 갖는 음식으로 이웃에게 대접하기 위해 만들기 때문에 결혼식이나 이드 알피트르와 같은 축제 행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리법 소고기와 양고기를

프로뱅 지역의 중세도시 상가지역

프로뱅 지역의 중세도시 상가지역

11~13세기 사이에 발달했던 중세 무역도시이자 요새 도시로 모직물 산업으로 유명했다. 중세에 만들어진 거주지 건물, 무역 창고, 종교 건축물, 요새 건축물들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일드프랑스 지방과 샹파뉴 지방 사이에 위치한 프로뱅(Provins)은 예전에는 샹파뉴 백작(Counts of Champagne)령에 속해있던 요새화된 중세도시였다. 12~13세기 동안 수 많은 상인들이 거래를 위해 머물렀던 곳으로 경제적 활기가 넘쳐났다. 이곳에서 열렸던 샹파뉴지방의 시장은 북유럽과 지중해지방을 연결시켰으며 지방 산업이었던 모직물 산업을 크게 확장 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모직물을 팔려는 플랑드르(Flanders) 상인들과 사려는 이탈리아 상인들은 이곳시장에서 만났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11~15세기 동안 지어진 창고, 요새, 교회, 집, 성탑과 같은 중세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2001년 프로뱅은 중세 주요 무역도시이자 요새도시로서의 그 가치와 훌륭한 보존 상태를 인정받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World Heritage)로 선정되었다.     11세기 초 샹파뉴 백작은 그 누구보다 빨리 장거리 무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영지 내에 있던 도시들의 지리적 이점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프로뱅은 주요한 교역로들의 교차지점에 위치한 곳이었다. 따라서 이곳에서 열린 시장은 항상 성황을 이루었고 12~13세기에 가서는 유럽의 주요 무역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지리적 이점만이 프로뱅 지방에 경제적 활기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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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룡사지

경주 황룡사지

6세기 신라시대 때 만들어져 고려 13세기 몽고의 침입으로 불 타 없어진 황룡사(皇龍寺)의 절 터.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왕명으로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566년에 주요 전당들이 완성되었고, 금당(金堂)은 584년(진평왕 6)에 완성되었다. 선덕여왕 14년(645년) 탑의 건조까지 모두 완성된 황룡사는 신라의 호국 신앙의 중심지였다. 황룡사 경내에는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었으며 이는 당나라 유학 후 돌아온 승려 자장대사의 건의로 백제의 '아비지'에 의해 3년 만에 완성된 신라의 상징물이었다. 현재 9층 목탑이 서 있던 자리에는 탑을 지탱해 주었던 중앙 기둥 주춧돌인 심초석이 남아 있다. 이 절은 신라 대궐인 월성(月城)이 동쪽에 있었는데, 그 창건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이 새로운 궁을 월성 동쪽 낮은 지대에 건립하려 했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왕이 새로운 궁 건립을 중지하고 절로 만들게 하여 황룡사라는 사명(寺名)을 내렸다고 한다. 국가적인 사찰이었기 때문에 역대 국왕의 거동도 잦았고 신라 국찰 중 제일의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신라 멸망 후에도 황룡사는 고려 왕조에 이어져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으며 9층 탑의 보수를 위해 목재까지 제공받았다. 그러나 1238년(고종 25) 몽골군의 침입으로 탑은 물론 일체의 건물이 불타없어졌다. 황룡사의 건물을 복원하고 황룡사 9층 목탑을 복원하고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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