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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제르 계곡의 선사시대 유적지 및 동굴벽화

베제르 계곡의 선사시대 유적지 및 동굴벽화

프랑스 누벨아키텐 레지옹(Nouvelle-Aquitaine Région)의 베제르 계곡 주위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인류의 모습을 보여주는 군락의 흔적 및 몽티냐크 마을에서 발견된 라스코 동굴벽화를 비롯한 암각화가 있는 25개의 동굴 유적지이다.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베제르 계곡에서는 호모사피엔스의 직계 조상으로 추정되는 크로마뇽인의 뼈가 발굴되었고, 선사시대 군락의 흔적이 147개소, 2000여 점에 달하는 벽화와 암각화가 있는 25개의 동굴 등이 발견되었다. 계곡 일대는 빙하기 말기에 인류의 조상들이 추위를 피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이런 갖가지 흔적들로 인하여 선사시대 인류 역사 연구는 물론 미술사에도 사료로 사용되고 있다. 1만 7000년 전의 사료가 보존되고 있는 베제르 계곡에서 가장 대표적인 유적은 몽티냐크(Montignac) 마을에서 발견된 라스코(Lascaux) 동굴벽화다. 1940년 마을 소년들이 우연히 발견한 동굴에는 기원전 1만 7000년 경의 벽화와 암각화 800여 점이 보존되어 있었다. 들소, 말, 사슴, 염소 등 100여 마리의 동물들이 등장하는 사냥 장면을 그린 그림은 사실적인 세밀한 묘사에 빨강, 검정, 노랑, 갈색 등 풍부한 색감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때문에 ‘선사시대의 루브르’, ‘석기 시대의 피카소’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 가로 길이가 5m가 넘는 검은 소 벽화를 비롯해 다양한 동물과 주술사의 모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냥의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63년 라스코 동굴은 벽화 보존을 위해 폐쇄되었고, 1983년부터 원래 동굴에서 200m 떨어진 곳에 복제동

도피아자

도피아자

양파를 주재료로 하여 고기와 향신료를 넣고 만든 카레로, 남아시아 요리이자 무굴 요리이다. 양파를 주재료로 하여 만든 카레이다. 남아시아 요리이자 무굴 요리로, 무굴 제국과 페르시아에서 유래하였다. 이란, 인도, 파키스탄 등에서 즐겨 먹으며 페르시아어로 ‘도피아자(Dopiaza)’는 ‘양파 두 개’라는 의미이다. 도피아자는 일반적으로 닭고기나 양고기, 소고기, 새우 등을 넣어 만들지만, 고기 없이도 감자나 콜리플라워 등을 첨가하여 채식 요리로도 만들 수 있다. 요리에 신맛을 내기위해서 카르다몸, 정향, 후추, 고춧가루, 소금 등의 향신료를 사용하며 이란에서는 양파 이외에 감자, 터메릭, 토마토, 호로파 잎 등을 첨가하기도 한다. 도피아자는 일반적으로 밥이나 샐러드 등과 함께 먹는다.  조리법 팬에 오일을 두르고 반으로 자른 샬롯을 튀겨 볼에 담아둔다. 같은 팬에 월계수잎, 카르다몸, 정향, 말린 칠리 고추, 후추를 넣고 볶다가 다진 양파, 마늘, 생강 페이스트를 추가한다. 그 다음 코리앤더 파우더, 터메릭 파우더, 고춧가루, 소금, 다진 토마토를 넣고 볶아 내용물이 걸쭉해지면 깍둑썰기한 닭가슴살을 넣고 약 15분간 더 가열하다가 앞서 튀겨놓은 샬롯을 넣고 뚜껑을 덮어 끓인다. 닭고기가 익으면 요리가 완성된 것이다. 완성된 도피

베른 옛 시가지

베른 옛 시가지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 있는 중세의 옛 시가지로 1983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스위스의 수도이자 베른주의 주도(州都)인 베른에 조성된 중세의 구시가지를 가리킨다. 12세기에 아레강(Aare River)으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건설되어 수세기에 걸쳐 발전해온 곳으로 지금까지도 중세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지정된 면적은 8만 4684㏊이다. 구시가지는 아레강이 둥글게 휘돌아가는 곳에 위치하여 동·남·북쪽의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여러 개의 다리로 강 건너의 신시가지와 연결된다. 베른은 원래 1191년 체링겐(Zähringen) 가문의 베르히톨트 공작 5세 (Duke Berchtold V)가 자신의 권력 중심지인 니데크 요새(Fort Nydegg)를 도심으로 하여 건설하였으며, 1218년 체링겐 가문이 단절되자 자유도시가 되면서 서쪽의 차이트글로헨투름(Zeitglochenturm)으로 도심을 확장하였다. 사부아(Savoy)의 보호국으로 있던 1255~1265년 사이에 도시는 서쪽의 베른 감옥탑(Käfigturm)까지 확장되었다. 1270년에는 니데크 요새를 허물고 남부 구역을 건설하였으며, 14세기에 마지막으로 확장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후 1848년 스위스의 수도가 되었으며, 1919년 서쪽으로 도시를 확장하여 신시가지를 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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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전투

청산리전투

1920년 10월 21∼26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 청산리전투의 배경 20세기 초 무렵 북간도로 이주한 한인들은 서전서숙(瑞甸書塾), 명동학교(明東學校) 등 100여 곳의 근대식 교육기관의 설립을 통하여 근대적 민족교육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기관은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 등과 같이 점차 독립운동기지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은 독립운동노선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독립운동단체들은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 집결하였고, 기존의 독립운동단체를 독립군으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조직된 독립군은 두만강aodro과 압록강 접경지대, 만주 및 연해주 일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특히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비롯하여 북로군정서, 대한국민회군(大韓國民會軍) 등은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하여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일제는 직접 일본군을 간도로 침공시켜 독립군과 항일단체를 없애고자 하였다. 이에 1920년 6월 6일 일제는 조선주둔일본군(朝鮮駐屯日本軍) 제19사단을 동원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가 주둔하던 봉오동(鳳梧洞)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훈춘사건과 일제의 간도 출병 1920년 9월 12일 마적(馬賊)들이 훈춘[琿春] 시가를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10월 2일에 다시 훈춘에 등장하여 일본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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