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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병인양요

1866년 병인박해 때 프랑스인 신부가 처형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가 조선의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
배경 조선은 1866년 2월 천주교를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禁壓令) 이를 믿는 자들을 체포하였다. 이후 1871년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프랑스 선교사 12명 가운데 9명을 비롯하여 남종삼(南鍾三)·정의배(丁義培) 등 한국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병인박해). 그해 5월 조선을 탈출한 펠릭스 클레르 리델(Félix Clair Ridel) 신부는 7월 중국 톈진[天津]에 주둔한 프랑스 함대 사령관 피에르 로즈(Pierre Gustave Roze) 제독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박해를 알렸다. 리델 신부는 베이징[北京]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Henri de Bellonet)에게도 병인박해의 발생을 알렸는데, 프랑스 본국은 조선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신부 처형을 군사 문제로 규정하여 로즈에게 이를 전담하게 하였으며,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의 칙령으로 조선 출병을 승인하였다. 1차 침입 : 프랑스의 수로 탐사 9월 18일 로즈 제독이 인솔한 프랑스 군함 3척은 공격에 앞서 강화도 인근과 한강의 수로를 탐색하였다. 그리고 작약도(芍藥島)에 정박하여 수로 탐색을 개시하였다. 프랑스의 접근을 발견한 영종진(永宗鎭) 첨절제사(僉節制使) 심영규(沈永奎)는 방문 목적을 물었으나 프랑스는 이를 묵살하였다. 프랑스는 한강으로 진입하는 수로의 발견에 성공하였고, 군함을 강화해협

락사

락사

코코넛밀크, 칠리 고추 등을 첨가하여 만든 매콤한 맛의 쌀국수로, 말레이시아의 요리이자 페라나칸 요리(Peranakan cuisine)에 해당한다. 코코넛 밀크를 넣은 매콤한 맛의 쌀국수이다. 락사는 페라나칸 요리로 알려져 있지만, 요리에 타이의 식재료인 민트와 타마린드가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타이의 영향을 받은 음식이라고도 추정된다. 락사는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타이 남부 등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노점이나 식당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이며 특히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는 이를 전문으로 파는 식당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다. 생선 육수나 닭 육수를 기본으로 하여 칠리고추에 코코넛 밀크나 타마린드, 블라찬 등을 첨가하여 만드는데, 요리에 쓰이는 국수는 주로 두꺼운 쌀국수 면인 락사 누들(laksa noodles)이 활용되나 얇은 쌀국수 면인 라이스 버미첼리(rice vermicelli)나 밀면, 에그 누들(egg noodles) 등이 사용되기도 한다. 요리에는 생야채부터 고기, 해산물, 두부 등 다양한 재료를 고명으로 올려 먹을 수 있으며 삼발을 곁들여 먹을 수도 있다. 종류 카레 락사(Curry laksa)는 말레이시아의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와 싱가포르에서 즐겨 먹는 종류로, 코코넛 밀크를 첨가하여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난다. 흔히 ‘락사(Laks

베르사유 궁전과 공원

베르사유 궁전과 공원

프랑스 일드프랑스 지역의 베르사유에 있는 바로크양식의 궁전으로 본래 루이 13세가 사냥용으로 지은 별장을 루이 14세가 증축하여 1685년에 완성되었다. 절대왕정의 산물로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어 현재는 관광지로 이용된다.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짐은 곧 국가’라고 말했던 태양왕 루이 14세가 지은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물이다. 바로크 양식의 대궁전으로 건물 자체는 물론 내부장식과 부르봉 왕가의 유물과 소장품들, 궁전의 정원까지 당대의 화려함을 엿 볼 수 있다. 애초 루이 13세가 지은 작은 사냥용 별장을 루이 14세가 광대한 정원을 갖춘 대궁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루이 르 보(Louis Le Vau)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이 건물 설계를 맡고, 천재적인 조경사 앙드레 르 노트르(Andre Le Notre)가 정원 설계를 맡았다. 2만 명의 인원에 50년이 넘는 대공사 끝에 태양왕이 72세 되던 해에 완성되었다. 총길이 680m에 남북에 별관을 설치해 대칭형으로 지은 궁전은 이후 유럽 많은 군주들의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궁전은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절대왕정의 상징물로 약탈과 파괴의 대상이 되었으나, 현재는 관광지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베르사유 궁전은 웅장한 외관 못지 않게 화려한 내부로 유명하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7개의 대형 거울이 설치된 ‘거울의 방’이다. 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3m인 이 방의 천장은 프레스코화로 덮여 있고, 곳곳에 대형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이외에도 말을 타고 적과 싸우는 루이 14세의 커다란 부조가 있는 ‘전쟁의 방’, 루이 14세의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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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4·19혁명

1960년 4월 19일에 절정을 이룬 한국 학생의 일련의 반부정(反不正)·반정부(反政府) 항쟁. 1960년 4월 19일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개표를 조작하자 이에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주장하며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혁명이다. 정부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야기하면서 영구집권(永久執權)을 꾀했던 이승만(李承晩)과 자유당정권(自由黨政權)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第二共和國)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이는 비합헌적(非合憲的)인 방법으로 헌정체제(憲政體制)의 변혁과 정권교체를 결과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혁명(革命)으로 규정하여 이를 4월혁명, 4·19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김영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 간접원인 4·19혁명을 초래하게 된 근본원인은 종신집권을 노린 대통령 이승만의 지나친 정권욕과 독재성 및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의 부패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평불만이 누적된 데 있다. 이승만은 환국(還國) 이후 다른 어떤 민족지도자보다도 가장 두터운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얻었을 뿐 아니라 탁월한 수완으로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다.이러한 국민적 신망은 그에게 '나밖에 없다'는 오만과 카리스마적 권위의식을 가지게 하였고, 또한 이것은 그의 끝없는 정권욕과 독재성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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